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침을 열며] 복지, 잘 쓰면 藥이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복지, 잘 쓰면 藥이다

입력
2005.09.28 00:00
0 0

한국을 복지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서구 복지 선진국의 복지 혜택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면 복지국가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미국에도 없는 전국민 건강보험뿐만 아니라 근로자라면 누구나 적용 대상인 산재와 실업보험을 가지고 있다. 전국민 연금제도는 물론이고, 부가적으로 퇴직금 제도도 있다.

이뿐인가? 육아휴직에 출산장려금까지 지급하고, 일본보다 앞선 공적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도 갖추고 있다. 한국은 서구의 복지국가들과 비교할 때 도입 시기만 좀 늦었을 뿐, 제도적으로는 크게 손색이 없는 사회보장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없어도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7% 수준에 불과한 한국의 사회보장비 지출은 제도적 성숙과 함께 20년 후에는 GDP의 20%에 이르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서구 복지국가들의 지출 규모는 GDP의 25%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복지국가라 부르기에 주저하게 된다. 제도적으로는 복지국가인데 내용상으로는 아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라 한다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회보장의 혜택이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이들이 대부분 배제되어 있다.

왜 그런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기본적으로 안정된 고용 관계와 보험료 납부 능력을 전제로 한 사회보험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의 가입률이 97%나 되는 반면 비정규직의 가입률은 26%에 불과하다. 고용 상태가 불안하고 월급도 쥐꼬리만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보험료 납부를 강제하고, 이를 준수하지 못하면 노후에 연금수급권을 부여하지 않는 매몰찬 제도다.

연금뿐인가? 고용보험과 산재보험도 마찬가지이다. 정규직은 거의 100% 가까운 가입률을 자랑하지만 정작 보호받아야 할 비정규직은 배제되어 있다. 저소득자에게 의료보호를 제공하는 건강보험은 조금 사정이 낫다. 하지만 큰 병에 걸리면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저소득층은 끝없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퇴직금도 안정된 직장의 중산층 노동자들에게는 당연시되지만 비정규직에게는 남의 얘기이다. 월 40만원의 육아휴직수당도 고용보험에 가입한 정규직 여성 노동자만이 혜택을 누린다.

이처럼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버린 사회보장제도를 가지고 복지국가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사회지출이 아무리 선진국 수준이 되어도 안정된 직장의 정규직만 혜택을 보는 복지제도는 오히려 양극화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배제된 이웃들을 위해 사회보장제도의 내실화를 기해야 할 때이다.

이들이 사회적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은 이들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국가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급격한 인구 감소로 성장 잠재력이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는 한정된 인적자원을 고도화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80의 양극화 사회에서는 80%의 인적자원을 사장시키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도 빈곤 가정의 자녀는 학업 성취도가 높을 수 없다. 실업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는 변화하는 산업 수요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기술과 숙련 수준을 높이는 자기계발은 꿈도 못 꾼다. 게다가 육아비 걱정 때문에 혹은 빈곤의 대물림이 싫어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아예 없는 것이다.

왜 복지 양극화 현상이 없는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가 우리보다 출산율이 훨씬 높고, 노동유연성도 높으며, 항상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를 크게 앞서는지 그 이유를 물을 때다. 복지는 ‘병’이 아니다. 잘만 쓰면 이처럼 좋은 ‘약’도 없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