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 아이가 지난 달 대학교 기숙사로 떠났다. 인스턴트 밥과 김, 오이지를 짐 속에 꾸려 넣고서. 그 아이는 기숙사에서도 틈이 나면 랩 탑으로 한국 연속극을 볼 것이다.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욕먹을 소리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특별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미국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오히려 더 중시했을 것이다. 미국은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우리는 그 중 일원인 코리안_아메리칸이라는 것, 한국 민족에게 우수한 전통 문화가 있는 것처럼 각 민족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으며 우리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 때문에 방학도 없이 일 년 열두 달 탁아소에 가야 하는 아이가 딱해 나는 토요일이면 아이를 한국학교에 보내는 대신 늦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이는 중학교 때까지 미국 중산층 백인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먹는 것을 먹고 입는 것을 입었다. 그러다가 중학교2학년 때였을 것이다. 한국에 다녀온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다리(육교) 위에서 내려다 보니까 세상에! 똑 같은 까만 머리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 있던지….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참 좋았어.”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가? 이후 아이는 한국과 한국 사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H.O.T의 노래에서 시작된 한국에 대한 동경은 급기야 독학으로 한글을 읽고 쓰게 만들었다.
아이가 즐겨 찾는 웹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 아이처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한국의 가요나 연속극, 연예인들에 대한 감상을 봇물처럼 쏟아 놓는다. 물론 영어로.
부모 세대의 뇌리에 박힌 한국의 모습이 가난과 개발독재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 아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밝고 화려하다. 그들에게 한국은 삼성 휴대전화와 현대 자동차의 나라이며, 예쁘고 아기자기한 팬시용품의 천국인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장차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낙관만 하기에는 현실이 녹녹치 않다. 벌써 주위에서 부푼 기대를 안고 한국에 나갔다가 상처받고 돌아온 2세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우리 아이는 오늘도 기숙사에서 ‘Aja! Geum Soon’(딸 아이는 ‘굳세어라 금순아’를 이렇게 표기한다)을 찾아볼 것이고, 나는 옛날처럼 자신 있게 코리안_아메리칸론을 들먹이지 못한다. 딸 아이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에 가슴 한 구석이 아파온다.
한수민 미국 시카고 거주 국제로타리 세계본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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