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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30) 李珍明의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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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30) 李珍明의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입력
2005.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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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의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는 무늬의 세계다. 현실과 몽환이, 성(聖)과 속(俗)이 서로 스미며 만들어내는 이 무늬들은 엷디엷은 몸뚱이를 포개고 부딪치며 그들끼리 오롯이 살아간다.

이진명(50)의 첫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1992년: 이하 ‘밤에 용서라는’)에는 제목에 ‘무늬’라는 말을 품은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다.

‘무늬 남다’와 ‘무늬들은 빈집에서’가 그것들이다. ‘무늬 남다’의 화자는 어느 가을날 한 미술관엘 들른 두 연인(으로 짐작되는 젊은이들)이 남긴 무늬다. 시 첫머리에서 화자는 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무늬였다. 미술관 정원을 떠돌며 산다. 여럿의 다른 무늬도 함께 산다. 계절이 돌아오고 또다시 돌아와도 그들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유는 이 연인들이 헤어졌기 때문인 듯하다. 둘째 연의 “여자가 갑자기 잡은 손을 뿌리치며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남자도 곧 뒤따라 일어섰지만 서성거리고 서성거리기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알 수 없다”는 대목을 보면 말이다. ‘나’인 무늬는 왜 그 다음을 알 수 없는가? “그들이 서로 돌아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수놓아지지 않았으므로.” 문제의 그 날, 그 두 연인은 “도시에서 만났다. 공원의 보도블록을 세며. 기다리었다.

청신호. 나를 수놓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 미술관으로 오르며.” 화자인 무늬는 그들이 “아주 헤어졌나보다”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이젠 더 이상 수놓아지지 않는) 나는 그 두 사람의 무늬이므로. 그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선 언제고 이어져 수놓아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몸이므로.”

무늬인 화자는 “미술관 정원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떠돌았다. 벤치를. 파초 화분 옆을. 자갈돌 전람회랑 복도를. 두 개의 종이컵 속을.” 여기서 벤치와 파초 화분과 자갈돌 전람회랑 복도와 두 개의 종이컵은 두 사람의 기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화자인 무늬가 미술관 정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 새겨진 두 사람의 기억(여기서 ‘두 사람’은 기억의 주체이기도 하고 객체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무늬인 ‘나’ 역시 기억의 객체이기도 하고 주체이기도 할 것이다)이 미술관 정원을 거처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닌게아니라 화자는 첫째 연에서 말한다.

“무늬의 삶은 기억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짧지 않은 사설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들은 나를 잊었겠지만. 아니 내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말하여주리라. 세상에는 오롯이 우리 무늬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고.”

이 시의 전문을 채 읽어보지 않은 독자에게는 지금까지의 설명이 어수선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간추리자면, ‘무늬 남다’의 화자는 어떤 연인들이 미술관 정원에 남긴 무늬이고, 그는 다른 여러 무늬와 이 정원에 갇혀 산다. 그리고 그 연인들이 수놓은 무늬(화자)는 그들이 헤어진 뒤에는 더 이상 수놓아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늬들은 빈집에서’라는 작품을 보자. ‘무늬 남다’의 화자가 무늬 자체인 데 비해, ‘무늬들은 빈집에서’의 화자는 무늬를 엿보는 자다. 그는 언덕에서 어느 빈집을 내려다보며 그 곳에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하다고 느낀다. 화자는 그것이 무늬들임을 이내 깨닫는다. 그 무늬들은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이고, “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과 생각, 그러니까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이제 우리는 이진명의 시들에 몸을 들이미는 ‘무늬’의 윤곽을 어렴풋이라도 그릴 수 있다. 그 무늬는 생의 자국이랄까 기억이랄까 기운이랄까, 아무튼 잔여물 같은 것이다.

그 자취나 기억을 남기는 것이 꼭 寬@?아니어도 좋다. 그 무늬는 (의제된 영적 존재로서의) 만물의 흔적이자 기억이자 기운이다. 본디 무늬라는 것은 장식적 형상이어서 치장되는 본체에 종속되게 마련이지만, 이진명은 그 무늬에다가 본체와 맞먹는, 어쩌면 그 이상의 독립성을 베푼다.

이진명의 무늬는 본체보다도 오래 남는다. 본체가 사라진 뒤에도 무늬는 그 자리를 서성거린다. 무늬의 기원이 심미적 맥락 외에 피화기복(避禍祈福)을 바라는 일종의 주술적 맥락에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진명의 무늬가 정령(精靈)의 이미지를 띠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밤에 용서라는’ 속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로 내가 무늬를 고른 것은, 실제로 이 시집 자체가 일종의 무늬이기 때문이다. ‘무늬들은 빈집에서’의 화자는 무늬를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라고 말했다. 시집 ‘밤에 용서라는’의 세계 자체가 엷디엷다. ‘끄트머리에는 언제나’의 가객이 제 노래를 “끄트머리에는 언제나 고요가 산다/ 엷고도 가득하다”라는 말로 시작할 때, 그 엷고도 가득한 고요 역시 일종의 무늬다.

‘무늬 남다’의 화자인 무늬는 “그들은 나를 잊었겠지만. 아니 내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한다.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

무늬는 기억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만들어진 기억’인지도 모른다. 아니, 무늬는 그 둘 다다. 무늬는 ‘실제의’ 기억/체험과 ‘만들어진’ 기억/체험이, 현실과 몽환이 버무려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또렷하지 못하고 엷디엷다.

‘밤에 용서라는’에 묶인 시편들의 적잖은 양은 이렇게 현실과 몽환을 버무리고 있다. 몽환이 승할 때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나 ‘마법이야기’ 같은 작품이 나오고, 둘 사이의 힘이 엇비슷할 때 ‘눈’ 같은 작품이 나오며, 현실이 승할 때 ‘서랭이절’이나 ‘복자수도원’ 같은 작품이 나온다.

‘서랭이절’이나 ‘복자수도원’이, 비록 일상 체험의 견고함에 떠받쳐져 있다고 해도 여전히 몽환적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무늬처럼 엷디엷다는 것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서랭이절’의 화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서쪽에 있다는 서래암(西來庵)”을 결국 만나지 못한다.

‘복자수도원’의 화자가 버릇들인 산책의 “끝에는 복자수도원이 있”지만, 그는, 마지막 행에 이르러,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고 털어놓음으로써, 그 때까지의 제 언술을 엷디엷게 만든다. 이 엷디엷음이 ‘밤에 용서라는’의 세계다. 시인은 시집 들머리에 놓인 작품에 ‘청담(淸談)’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청담(淸淡)’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 청담의 마음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먼저 간 내 마음이/ 상징의 둥그런 지붕을 이룬 곳/ 강 건너 왕국/ 그곳 왕국에서만 자라나는 무우수(無憂樹)/ 그 그늘 아래/ 나는 만날 것입니다/ 그 때 너, 먼저 간 너는 나를 지우고/ 나는 그리운 너를 지우”(‘무우수 그늘 아래’)는 경지이지만, ‘서래암’이나 ‘복자수도원’에서도 보듯, 서정적 자아의 발걸음이 사찰이나 수도원의 내부로까지 다다르는 일은 없다.

이진명의 화자들은 드물지 않게 신심에 가까운 마음자리를 보여주지만, 결국은 세속의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여행’의 화자가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 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이라고 말할 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탈속자의 달관이라기보다 차라리 사무치는 허세다. 이진명의 무늬는 그런 성(聖)과 속(俗)이 서로 스미며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밤에 용서라는’이 종교적이라면, 그 종교는 애니미즘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와 환상을, 성과 속을 버무리며 무늬들을 만들어내는 데 시인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이진명의 목소리는 더러 (시적 언술로서는) 다소 풀려있고, 이 시인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와 조곤조곤한 말투가 그 풀림과 길게 교호할 때 성마른 독자의 싫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밤에 용서라는’이 도달한 그 청담의 경지에는 가파른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그 경지가, 그 표제작이 내비치듯,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와,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와,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와,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과,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 뒤에 온 것인 만큼 더욱 그렇다.

사족 하나. ‘그렇게 사탕을 먹으며’라는 작품에는 귀향과 퇴행의 욕망이 사탕을 매개로 그려져 있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그 시 위에 포갠다. 이 감독이 이 시를 읽은 것일까? 사탕이 퇴행 욕망의 매개물로 너무 자연스러운 만큼, 그 남자가 그 여자의 시를 안 읽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만.

▲ 납가새꽃

바닷가 모래땅

납가?핀다

소금바람 맞으며

메마른 모래뭉치 속에

키 작게 키 작게

바다 물결 갈피에

노란 꽃 숨기고

여름날 긴 해를 넘긴다

지난날 내 짧았던 사랑

한해살이풀

고르지 못한 잎의 시간을 달고

하늘, 바다, 여름해

그 길없는 우주를 껴안아도

인색한 사랑

발치를 적시지 않는다

끄트머리 바다에까지 나아와

모래먼지에 쌓여 쓰러질 뿐인

납가새, 지난날 버려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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