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갔다.”
마치 그러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처럼, 다분히 감정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드라마가 초반 불을 확 지르지 못하면 대뜸 이렇게 말하곤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년 전 ‘완전한 사랑’, 5월에 끝난 ‘부모님전상서’ 때도 그랬다.
이상한 것은 ‘갔다’의 기준이다. 다른 작가 같으면 드라마 한 편이 인기를 얻고 나면 두세 편의 부진은 용서가 되는데, 그에게 만은 40년 가까이 늘 ‘시청률 1위’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런 모순에 대해 정작 작가는 별로 억울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언어의 마술사라고 부르는 김수현(62)씨다운 짧고 날카로운 한 마디. “수도 없이 갔다. 작품 내놓을 때마다 갔다 왔다. 재미있다, 그들의 경박함이.”
어쩌면 이런 매정하고 불공정한 잣대야말로 우리 스스로 마음 속으로 ‘김수현 신화’를 인정하고, 계속 되길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신화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방송사에 대놓고 “시청률 포기해라” 라며 시작한, 특유의 자극적 대사와 갈등이 사라져 “김수현 드라마가 뭐 저래” 라는 소리를 들은 ‘부모님전상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신화를 위해 10월부터 집필에 들어간다. 내년 1월 14일부터 SBS TV를 통해 방영될 ‘사랑과 야망’(연출 곽영범)이다. ‘청춘의 덫’에 이은 그의 두번째 리메이크 작품이다.
이 드라마가 다시 만들어진다고 하니까 당시 열성 시청자였던 40, 50대는 ‘기억’ 에 설레고, 그 기억이 없는 20대 젊은이들은 이제는 오랜 은퇴로 ‘전설’이 된 주연여배우 차화연에 궁금해하고 있다.
‘반인륜적’이란 혹독한 비판으로 도중하차해 한(恨)이 남아있을 법한데도 ‘드라마는 흘러가 버리면 그만’이라며 1998년 ‘청춘의 덫’ 리메이크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과 달리 김씨는 “이 작품만은 꼭 다시 한번 해 보고 싶어” 한다. 폭발적 인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라면 리메이크해야 할 드라마가 어디 이것뿐이랴. “가족사란 드라마의 영원한 테마이다. 구닥다리라고 하면서도 오늘도 다루고 있지 않은가. 몸 바쳐 뒷바라지 해준 남자가 야망을 위해 등을 돌리고, 그런 남자의 등을 봐야 하는 여자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원칙’이니 한번 더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시대나 인물을 바꿀 생각도 없다. “산업화가 막 시작되는 그 시대(1950, 60년대)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70, 80년대 가족사는 오늘과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시대상황에 필요할 것 같아 자료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스토리를 바꿀 생각도 없다. 캐릭터만 좀 보강하려 한다.”
정확하게 20년 만의 재탄생이다, ‘청춘의 덫’도 ‘사랑과 야망’도. 드라마란 유행가처럼 시대 분위기를 타고 왁자지껄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것이라고 한다면, 20년 지난 뒤에도 그의 작품이 유효한 이유는 뭘까. ‘새엄마’(1972년)부터 ‘부모님전상서’까지 드라마마다 수돗물 사용량이 줄고 거리가 한산할 만큼 장안의 화제가 되는 이유 또한 뭘까.
혹자는 가장 통속적인 주제, 혹자는 도발적 캐릭터와 인간심리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대사라고 말하지만 그것으로 20년 만의 부활과 40년 가까운 롱런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한번 직접 물어보자.
“사랑이나 가족 얘기는 나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세월 속에 있어온 것이다. 난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살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가 만들어지고 피가 돌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시대가 발전하고 달라져도 내 드라마는 보여진다고 한다.”
김수현씨는 그런 인물만들기가 쉽다고 했다. 드라마 속의 모든 인물이 그의 분신이다. “아버지면 내가 그 아버지가 돼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접근하니까 마누라 패는 남자의 경우도 ‘이런 환경, 상황에서는 주먹이 나올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 드라마에 나쁜 사람은 없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 뿐.”
당연히 연기자도 그에 맞는 표현능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김수현 사단’이란 비판이 있어도 드라마를 위해 어쩔 수 없다. 그렇더라도 환갑을 넘긴 그가 가치관과 행동이 달라도 한참 다른 20대 젊은이가 될 수 있을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김삼순 또래를 생각하면 저절로 그들의 말투가 나온다.”
결국 이쯤에서 ‘김수현의 오만과 독설’로 비판받곤 하는 그의 작가론이 나오고 말았다. 작가란 열심히 노력하면 될 수는 있다는 것. 그러나 미니시리즈 한 편은 쓰겠지만, 노력만으로 평생 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작업이 힘들지 않으니까 한다. 대사는 어떻게, 또 이야기는 어떻게 식으로 고민한다면 내 성격에 벌써 때려치웠을 것이다.
안 나오면 덮어 놓는다. 다음날 앉으면 나온다. 나이가 들어 몸의 회복이 늦을 뿐이다. 젊을 때에는 밤새워 후딱 쓰고 놀았다.” 특별히 새로운 시도도 않는다. 있던 것에서 뭔가 늘 만들어진다고 했다. 타고난 작가다. 그릿鳴?그게 전부는 아니다. “책 많이 읽어라. 나도 엄청나게 읽었다, 재미있어서.”
김수현 드라마는 거꾸로 간다. 드라마가 실제 삶과는 동떨어진 도덕교과서일 때, 그는 ‘청춘의 덫’ ‘배반의 장미’로 위선의 꺼풀을 과감히 벗겨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 진보적이고 페미니스트였다. 그것이 싫어 20년 전 시청자들은 ‘여자가 표독스럽게 할말 다한다”며 싫어하거나, 여자의 선택을 인간의 한계로 이해하기보다는 불륜으로 매도했다.
요즘은 그 반대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때리는 엉망진창인 드라마 시대가 되자 조용히 부모 자식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가족드라마를 슬며시 내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쪽에서 “자기가 무슨 도덕군자라고” “골통 보수”라고 비판한다. “이제는 늙었나”, “마음이 바뀌었나”라는 소리도 듣는다.
그러나 그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다.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제대로 봤다면 예나 지금이나 드라마의 성격에 따라 톤이 다르다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 다른 꼴을 못 봐 넘기는 것도 알 것이다. 나도, 내 드라마도 세상 속에 있다.”
김수현씨는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오락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좋은 의미를 남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뒤에 ‘작가’란 말이 붙는 것도, 내 드라마가 거꾸로 가는 것도, 가끔 쓴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겨먹은 게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보수, 진보 개념이 아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좋은 모습일 뿐이다.”
이대현 대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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