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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가보니/ 소설가 고은주가 쓴 청계천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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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가보니/ 소설가 고은주가 쓴 청계천 나들이

입력
2005.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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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개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나는 태어났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콘크리트를 덮어나가고 그 위에는 고가도로를 짓던 1970년대에 나는 쑥쑥 자라났다.

그 구조물에 고도 성장의 빛과 그늘이 고스란히 드리우던 1980년대에 나는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수많은 차량의 분진을 떠안으며 청계천로가 낡아가던 1990년대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9월의 마지막 일요일, 청계천 시점부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부터 길을 나선다. 재건과 성장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모두 덮고 달려온 세월, 그 시간 속에서 나 또한 제대로 숨돌릴 틈 없이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쯤에서 돌아보며 쉼표 하나 찍어볼 때도 되었다. 이 공룡 같은 도시에서 기적처럼 되살아나 흐르기 시작한 청계천, 그곳에서라면 쉼표를 얼마든지 발견해낼 수 있으리라.

개통을 6일 앞둔 휴일의 청계천은 마무리 공사가 조용히 진행 중이다. 물은 이미 흐르기 시작했고 인부들은 여유롭게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다. 계단의 출입구가 막혀 있기 때문에 아직 물 가까이 내려갈 수는 없다.

그래도 어떻게 들어갔는지 몇몇 시민들이 물가의 산책로를 걷고 있지만 나는 철제 난간을 따라 걸으며 청계천을 내려다보기로 마음 먹는다. 난간에 휘둘러놓은 초록색 망사가 면사포처럼 보여서 그게 걷힐 때까지는 곱게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청계천의 다리들을 건너다니게 되었다. 음력 정월 보름에 청계천으로 몰려나와 열두 개의 다리를 밟으며 한해 동안의 건강을 기원했다던 조선시대 사람들처럼….

아직 초록색 망사에 둘러싸여 있는 첫 다리 모전교부터 옛 다리의 형식을 살려 지은 터라 제법 대보름 밤의 다리밟기 같은 운치가 느껴진다. 가을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화강암의 빛깔이 새로 놓은 다리의 어설픈 느낌을 더해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나타나는 다리는 나를 단숨에 600년 전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검푸른 물때가 그대로 남아있는 교각,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여 색깔 차이가 선명한 난간석.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느낌이 역력한 저 다리는 1410년에 지어졌다는 광통교. 전차선로 공사 때문에 콘크리트를 쏟아부어 훼손한 지 95년 만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지하에 파묻어버린 지 47년 만에 복원했지만 원래 있던 자리에서 서쪽으로 155㎙나 옮겨졌다.

경복궁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가 청계천과 만나서 넓게 통하는 지역이었던 광통방.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 불리며 도성 제일의 다리로 늘 사람들이 북적댔지만 이제 그 자리는 너무 넓어져서 철근 콘크리트로 현대식 광교를 지어놓았다.

광통교 위에서 바라보는 광교는 밋밋하고 재미없다. 저곳에서 600년을 버티며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차량의 물결에 시달렸던 다리인데 이곳까지 옮겨지느라 또 시달리지는 않았을지….

광통교를 벗어나면서 다리 아래 석축을 이루고 있는 신장석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화엄신장을 둘러싼 신비한 구름 무늬와 그 아래 단아한 덩굴 무늬를 아로새긴 열두 개의 신장석은 태조 이성계가 계비 신덕왕후를 위해 당대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만든 묘석이었다.

그 돌이 묘지를 떠나 뭇사람의 발에 밟히게 된 사연이야 어떻든 조선 초기의 석공이 새겨놓은 정교한 무늬는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광통교 교각에 새겨진 기사대준(己巳大濬), 경진지평(庚辰地平) 등의 글씨는 조선시대에 지속적인 청계천 치수 사업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600여년 전, 조선을 개국하고 이곳에 도읍을 정할 때만 해도 이 물길은 청풍계의 맑은 계곡물이 그대로 흘러가던 자연하천이었으나 태종 때 폭을 넓히고 둑을 쌓는 큰 공사를 하면서 물길이 열렸다는 의미로 개천(開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일제시대까지 개천은 도성의 하수도와 빨래터와 놀이터의 역할을 두루 해내면서 생활 하천으로 흘러왔다.

나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서 옛 서울의 물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경복궁 서북쪽 백운동의 작은 샘에서 솟아나온 물이 북악산과 인왕산의 여러 물줄기와 만나 동쪽으로 흘러가다 장통교 근처에서 남산의 물줄기를 만난다. 그래서 개천의 폭이 넓어지고 다리도 길어지게 되었으니 다리 이름 또한 장통교가 되었다. 화강암으로 다리를 놓았지만 옛모습의 그 다리는 아니다.

수표교는 옛모습을 흉내내긴 했으나 나무 재질에 붉은 갈색을 칠해놓아 옛 돌다리의 데스마스크처럼 보인다. 장충단 공원에 놓여있는 옛 수표교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서 복개 공사가 시작될 때에도 그렇게 따로 옮겨두었다는데 왜 이번에 제자리를 찾지 못했는지, 언젠가는 옮겨다 복원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언제가 될는지….

이후로 이어지는 다리들도 모두 새로 지은 다리인데다 대부분 현대식 디자括繭撰?다리밟기의 기분을 내기가 힘들다. 게다가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다리는 횡단보도를 세 번씩 건너야 다리 저쪽 편으로 갈 수 있다.

때로는 지하도를 건너야 하기도 한다. 청계천 난간 쪽으로 바짝 붙어서 걸어도 인도가 워낙 좁기 때문에 청계천로의 자동차가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자동차의 열기와 매연 때문에 다리밟기는 이제 다리로 피난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나는 자주 다리 위에 멈춰 서서 물길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물길이 넓어지고 다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도 강해진다. 옛 사람들이 청계천의 다리 위에서 연날리기를 즐겼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리 위에서 연등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지. 제각기 만들어서 들고 온 연꽃등을 하늘 높이 걸어놓는 풍경 대신 이제는 매일 화려한 조명의 밤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곳곳에 설치된 조명등이 일제히 켜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청계천을 걷다보니 어느새 동대문 근처다.

옛 서울의 성곽이 동대문을 지나 청계천과 만났던 자리에 놓여진 다리는 오간수교. 성곽 윗부분의 성가퀴 모양으로 난간석을 만들어 옛 다리의 느낌을 살려놓았다.

본래 성벽이었던 그곳에는 다섯 개의 수문이 있었으니 그 오간수문을 기점으로 성곽 안쪽은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 인공하천으로, 성곽 바깥쪽은 본래 모습 그대로인 자연하천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지금은 오간수문이 사라졌듯 그런 구분도 사라져버렸다. 청계천은 여전히 직선으로 깨끗하게 다듬어진 인공하천으로 흘러간다.

그나마 다산교를 지나면서부터 물길이 휘어져 자연스러운 굴곡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비우당교를 지나면서부터는 성북천이 흘러들어 넓은 물길의 자연하천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이윽고 무학교 근처에 이르자 백로 한 마리가 눈에 띈다. 청계 고가도로의 교각 3개를 그대로 남겨둔 것을 배경으로 백로는 유유히 청계천의 징검다리를 건너다니고 있다.

이제 기나긴 쉼표의 여정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저기 두물다리, 그리고 저 멀리 고산자교를 지나면 청계천은 크게 남쪽으로 휘어지며 한강으로 흘러가겠지. 서

쪽의 바다로 도도히 흘러가겠지. 그 강물처럼 흘러가다가 문득 쉼표가 그리워지면 나는 또다시 오늘처럼 청계천을 찾을 것이다.

그때는 이곳 하류에서부터 여정을 시작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다. 그때는 물가의 산책로를 걷다가 저 백로와 가까이에서 눈 맞출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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