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서양의 많은 예술가들- 문학이나 미술계뿐 아니라 록 뮤지션들이나 젊은 영화인들에게도 시인 랭보는 오랫동안 인용되어온 진취적인 젊음의 한 상징이었다.
밥 딜런이나 짐 모리슨을 랭보와 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뿐 아니라 뉴욕 펑크계의 여걸 패티 스미스는 숫제 ‘랭보를 향해 가자!’라고 노래했을 정도다. 그 외, 장 뤽 고다르나 페데리코 펠리니 레오스 카락스 등의 영화에도 랭보는 곧잘 인용된다.
요컨대, 소위 젊음의 극단을 예술에 바친 자들에게 랭보는 삶과 예술의 근원적 태도를 예시하는 표본역할을 해온 셈이다. 그 이전까지 소급한다면 20세기 초, 다다이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이 랭보를 ‘재발견’한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스무 살 이전에 시의 절정에 올랐다가 돌연 아프리카의 사막으로 떠나 불가사의한 후반생을 보낸 랭보의 족적은 그 자체로 이야기 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외국 연구가들은 랭보의 마지막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 ‘일뤼미나씨옹(착색판화집)’이 쓰여진 시기를 추론하며 랭보의 심적 고뇌와 폭발적인 행동의 발원지점을 파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장중하게 이별을 고하는 듯한 어조와 일상적 삶과 문학에 대한 노골적인 조소 탓에 대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랭보의 마지막 작품이라 여기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유명한 폴 베를렌과의 총격사고(벨기에 브뤼셀에서 발생한 이 사건으로 랭보는 손목에 상처를 입고 베를렌은 교도소에 갇힌다.
랭보가 19세 때인 1873년의 일이다)를 회고하는 듯한 ‘방랑자’ 등의 시편을 보면 ‘일뤼미나씨옹’이 ‘지옥에서 보낸 한철’ 이후의 작품이라는 의견도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다.
순서야 어떻든,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랭보의 삶과 문학사적 의미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작품이라면 ‘일뤼미나씨옹’은 랭보의 시적 방법론과 이상을 나타낸 가장 ‘랭보다운’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모든 감각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을 조직화한 ‘견자의 시학’을 표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애송되는 랭보의 시는 ‘감각’이나 ‘나의 방랑생활’ 등 초기의 낭만파적 감성을 읊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진짜 랭보를 만나려면 지적 감각적 모험을 최초로 선보인 ‘모음들’이나 ‘취한 배’ 등의 시편들을 첫 술로 뜬 다음, ‘착색판화’의 세계에 제대로 한번 취해보아야 한다.
‘일뤼미나씨옹’의 원어는 ‘Illuminations’이다. 조명이나 계시, 계몽, 채색 등으로 직역되지만, 랭보의 작품을 얘기할 때엔 주로 ‘착색판화집’이란 번역으로 통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집 형태로 번역되어 나온 ‘착색판화집’은 총 25편의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산문시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일반적인 논리나 어법으로 ‘착색판화집’을 이해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언어의 일차적인 유비관계를 따져 의미를 파악하려 들거나 한 문장 안에 놓인 각기 상이한 단어들의 쓰임을 기존의 관념틀 안에서 풀이하려 하다가는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착색판화집’의 언어는 이성과 감성의 조합에 의해 추려진 말들이 아니라, 물질의 움직임과 반향들에 상응하여 자유분방하게 팽창하는 랭보 식의 육감적 언어의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눈(雪) 앞에서 키가 크고 아름다운 존재, 죽음의 휘파람과 소리 없는 노래 소리는 마치 환영처럼, 이 숭배되는 육체를 상승시키고 넓혀서 그렇게 한다. 주홍빛과 검은 상처 자국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육체 속에서 작렬한다. 생명의 고유한 빛깔이 짙어지고 춤추며 대(臺) 위에서 ‘환상’의 둘레를 벗어난다.
전율이 상승하여 포효한다. 이 같은 효과의 격렬한 흥취에 소멸할 휘파람과 목이 쉰 음악이 겹친다. 세계는 그것들을 우리들의 배후 멀리 아름다운 어머니 위에 던지고- 어머니는 물러가 일어선다. 오오, 우리들의 뼈는 새로운 사랑의 육체 옷을 또 입는다.
- 랭보, ‘미의 존재’에서
‘미’에 관한 존재증명이나 재정의로 읽히는 이 시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아님에도 표현의 현란함과 의미의 자유로운 비약이 놀랄 만큼 명징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굳이 대상을 꼽는다면 만물을 비추거나 감추고, 색을 부여하고, 어둠 속에 담갔다가 다시금 끄집어내는 빛의 운동이다.
태양으로 환유되는 그 빛은 태양 저편에서 쉼 없이 운동하옜裡聆?생성원리를 체현한다. 랭보가 진정 원했던 건 바로 그 태양 저편의,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재생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랭보에게 자연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나 감각 저편에 놓여있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다. 빛과 바람에 의해 수시로 형태를 변화시키는 자연물을 일차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착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의식을 제한한다.
랭보에게 그건 삶 자체의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랭보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아름다움은 단지 예술적 행위나 작품으로 드러나는 호사취미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육체’를 획득하며 끝없이 탈각하는 삶이다.
‘착색판화집’은 그 영원불멸의 미를 좇아 극미의 감각과 초월적 인식의 소산들이 결합하여 단박에 쓰여진 듯 보인다. 영구히 변화하는 세계의 표상들을 일일이 좇아가며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하는 건 매 순간 극점에 달한 감각이 저돌적인 전이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때 인간의 인식은 기존의 시간체계를 불현듯 이탈해 전혀 다른 우주 속에 홀로 놓여 신과 독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착색판화집’은 랭보의 전반생을 명멸하는 빛의 이미지 속에 압축시킨 영원성의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의 ‘서시’에서 랭보는 이렇게 읊조린다. “어느 저녁 나는 미(美)를 내 무릎에 앉혔다. – 그러고 보니 지독한 추(醜)였다. 그래서 욕을 퍼부어주었다.” 이 구절은 그 당시 고답적인 아름다움에 빠져있던 프랑스 시단 전반에 대한 반항으로 흔히 풀이되지만, 시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오려던 랭보가 스스로에게 던진 시적 파문의 일갈에 더 가깝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한 순간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던 세계가 자신의 무릎에 놓이는 순간, 추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아름다움의 속성 자체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느꼈을 거라는 뜻이다. 이건 시의 한계를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예술행위 전반이 가지고 있는 불가항력한 한계를 수긍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완벽하게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진다.
특유의 시건방진 말투로 랭보는 이렇게 자백한다. “‘행복’은 나의 업보, 나의 양심의 가책, 나의 고민의 씨앗이었다. 나의 삶은 언제나 너무 거대해서 향과 아름다움에는 헌신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랭보에게 아름다움은 위대한 순간성의 현현이자 명명백백한 양심의 투영물이어야 했다. 이 때 양심이란 일상적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영혼의 울렁임과 세계의 변화와 반향에 거짓 없이 반응하는 스스로의 필연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 내적 필연성은 삶의 무수한 순간들을 온몸으로 통과해나감으로써 비로소 감득하게 되는 순결성을 지향하게 된다. 그 순결은 그러나 미증유의 삶에 의하지 않고서는 실현되지 않는다.
고색창연하게 말해, 모든 고여있는 것들은 썩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형식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의 순결이란 순결을 빙자한 타락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스무 살의 건장한 청년 랭보가 그 기다란 다리를 성큼성큼 내디뎌 사막으로 떠날 때 그는 자신 속의 아이가 이미 늙어버렸음을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란 미성숙의 영혼이다. 그러나 그 미성숙은 영원한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에겐 세계의 모든 풍경을 오로지 자신의 발가벗은 영혼 속에 투영해내는 솔직함이 있다.
미성숙한 아이에겐 세계 또한 미완성의 영역이다. 랭보가 결국 추구했던 건 여전한 미지로 놓여있는 삶의 가능성 앞에 자신의 전(全) 존재를 투여하는 것이었다. 사막으로 떠나는 그는 자신 속에 또 다른 아이를 깨워 다시 한번 영원에 바쳐지는 ‘새벽’(랭보 시의 가장 주요한 테마는 ‘새벽’이었다. 랭보에게 새벽은 삶의 반복된 개벽을 의미했다.)을 만나고자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잠에 빠져있을 때 우주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재설비하며 만물의 시계를 다시 0으로 돌린다. 그걸 발견해내는 인간의 의식은 매 순간의 삶이 신천지로 나아가는 문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새벽은 영원히 반복되지만,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 이 단순무구한 법칙 앞에서 만물은 영원히 평등하다. 그러나 평등을 깨닫는 건 쉽지 않다. 그 평등을 알기 위해선 어쨌거나 태양의 눈높이에서 사물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랭보의 모험에 열광하는 모든 예술가들은 태양의 동선을 그대로 따라가 급기야 태양 저편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영원한 공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상은 만물을 살찌우고 삶의 핏기를 반복해서 펌프질하며 세계가 감춘 진실을 일순간 노출시킨다. 그러면서 안일에 빠진 일상에 드센 파문을 일으킨다.
그들과 함께 하는 순간, 아름다운 향을 풍기며 당신의 무릎에 놓인 화환이 갑자기 똥덩이로 변하더라도 놀라지는 마시라. 그것이 바로 시의 마술이고, 젊음의 마술이고, 삶의 근원적 질서를 일러주는 우주의 순수한 장난이니까.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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