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종로구 효자동 집에서 상왕십리 회사로 출퇴근해오던 김청계(41)씨. 그가 10년 넘게 고집해온 출퇴근 방식을 바꿨다.
1일 복원된 청계천 산책로를 따라 가볍게 조깅 삼아 회사로 달려가본 김씨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풀숲을 가끔 뒤척이는 오리들이 안겨주는 자연의 매력에 반해버렸다. 그는 빠르고 편리한 지하철 출근을 포기하고 청계천변을 따라 걷고 뛰며 회사를 오가기로 마음먹었다.
매주 집 근처 인왕산을 오가며 다리 근력을 키워 놓은 터라 회사까지 약 5㎞의 길을 속보로 오가는 것쯤은 무리가 아닐 것 같았다.
김씨는 정장구두는 사무실에 두고 달리기에 편한 검은색 운동화를 할인마트에서 2만5,000원을 주고 샀다.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는 직장인이 출퇴근길 운동을 하려면 하얀색 운동화를 피해주는 ‘센스’는 필수다.
# 10월 7일. 갑자기 시작한 도보 출퇴근으로 혹 몸살이 나더라도 다음날 푹 쉴 수 있는 금요일 아침을 첫 ‘청계천 도보 출근’ 디데이로 잡았다.
평소 지하철로 출근할 때 집에서 5호선 광화문역까지 걸어오는 시간을 포함해 40분을 통근시간으로 잡았던 김씨는 이날부터는 1시간 30분 정도로 넉넉히 걷는 시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오전 7시30분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만에 도착한 청계광장. 초록잔디 사이로 잘 닦인 쟁반처럼 투명한 가을하늘을 향해 물줄기를 쏘아올리는 분수가 여간 시원하지 않다.
MP3로 음악을 들어온 김씨는 일단 오늘만은 이어폰을 벗기로 했다. 이 얼마만인가. 서울 4대문 안에서 계곡물 소리를 듣다니.
인공음 대신 자연음을 듣기로 한 김씨는 중앙인사위원회 건물 건너편 진입로를 통해 산책로로 내려섰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군무를 펼친다. 운동화 끈을 조인 김씨의 첫발이 상쾌하게 속도를 붙였다.
모전교를 지나자 석재로 덮인 길이 풀숲을 거느린 부드러운 느낌의 산책로로 바뀐다. 다리 아래에서 폭이 2㎙ 정도로 좁아지며 생긴 여울을 향해 청계천 물이 힘차게 쏟아진다.
물빛이 몹시도 맑다. 김씨의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도 충분히 바닥이 보인다. 2급수란다. 잠실대교 부근 자양취수장에서 끌어올려진 2급수의 한강물과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1급수의 지하수가 청계천의 수원이라는 기사를 읽은 듯하다.
얼마 전에 남산에서 가재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조금 있으면 은어가 청계천에 등장했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 천변에는 김씨처럼 청계천 덕분에 하루아침에 ‘뚜벅이’로 돌아선 직장인들이 제법 보인다. 이어폰 벗기를 잘했다. 도로 위를 오가는 차량의 경적 소리가 가끔 흥을 깨지만 물소리를(그것도 맑은 물을!) 느끼는 정취를 놓칠 뻔했지 않은가.
광통교와 장통교를 지나자 코스모스의 물결이 끝나고 하늘색 꽃잎을 둥글게 펼친 벌개미취와 옥잠화, 호박꽃들이 빌딩숲에서 내려온 이방인의 흥을 돋운다. 가을 장독에 빠졌다 나온 듯 새빨간 고추잠자리가 정겹다.
앗차! 하마터면 저 징검다리를 놓칠 뻔했다. 얄궂게 울퉁불퉁하고 흔들거리기까지 해 행인의 바짓가랑이를 적시던 고향의 그것과는 달리 밟기 쉽게 넉넉한 돌덩어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을 이어주는 청계천의 징검다리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출근길의 청량제다.
장통교 아래 정조반차도 앞 징검다리를 건넌다. 구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에 손을 담갔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달아오른 목덜미가 냉수라도 맞은 듯 시원해진다.
김씨는 잠시 청계천이 콘크리트로 덮였던 시절을 생각해 본다. 반나절만 길을 걸어도 흰색 셔츠가 거무튀튀한 먼지로 덮이고 늦더위가 물러난 뒤라도 무거운 열기에 짓눌렸던 기억이다.
사실 청계천 복원으로 되찾은 것은 물이 아니라 하늘이다. 고가와 복개 시멘트를 뜯어내니 이 일대 평균온도가 3.6도나 내려갔다고 한다. 자연을 닮으면서 얻은 보너스다.
# 산책로로 내려선지 40여분이 지나자 동대문 앞 패턴천변에 다다른다. 상류와는 달리 천 폭이 넓어지면서 유속도 많이 느려졌다.
대신 하류로 다가갈수록 풀들이 무성해지고 지나는 사람도 적어져 호젓함이 느껴진다. 땀도 많이 솟아난다. 꽉 막혀 꼼짝 못하는 차량을 올려다보며 해방감도 느껴본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막혀있던 서울의 숨통이 뚫렸다는 말들을 한다. 바람길. 고가도로와 차량으로 오갈 데 없이 정체되어 있던 바람이 기분좋게 서에서 동으로 내달리게 됐다. 청계천이 흐르자 서소문로와 안산 자락에 음침하게 눌려있던 서울의 해묵은 음기(陰氣)도 시원하게 날아갈 것 같다.
걷기 시작한지 한 시간을 넘기자 다리가 뻐근해 온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절한 순애보가 담긴 영도교를 지나자 눈에 띄게 녹지가 넓어진다.
황학동 삼일아파트 부근에서 시작되는 청계천 하류는 각종 동식물들이 자리잡도록 습지로 꾸며졌다. 버들가지와 갈대가 무성히 자라고 물살을 버티려고 휘청이는 모습이 이름모를 풀꽃과 어우러져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한 달음이다. 청계광장에서 김씨의 회사가 있는 무학교 인근까지 5㎞의 출근길은 자연의 합주가 빚어내는 즉흥적인 선율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눈에 푸른 녹지와 강물만을 담은 채 저 멀리 탄천에서 한강을 거쳐 남산을 타고 넘으면 뚝딱 청계천이다. 여기서 힘을 더 내 인왕산, 북한산을 돌아가면 서울은 더 이상 콘크리트의 삭막한 도시가 아니다.
적당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회사 책상에 앉은 김씨는, 가까운 미래에 반달무늬를 멋들어지게 가슴에 품은 곰 한마리의 출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산 깊어지고 물 넓어진 서울을 기대해 본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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