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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8> 명지대 교육학습개발원 교수 권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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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8> 명지대 교육학습개발원 교수 권인숙

입력
2005.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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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좀 그만 보고 공부 좀 해!”

고 3때까지 어머니가 내게 하시던 잔소리의 중요 부분이다. TV 보고 소설책 읽는 재미로 간신히 버틸 만큼 학교도 공부도 싫어했던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공부하라고 독려하는 위치에 있다니 아이러니이다.

중학생 딸에게 공부를 재촉할 때마다 “엄마도 안 했잖아”라고 물을까 봐 늘 뒤가 켕긴다. 더욱 아이러니인 것은 공부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목표 달성의 도구로서 또는 삶의 의문이 생길 때마다 늘 공부를 해결책으로 선택해왔다는 것이다. 왜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복잡하고 긴 답변이 따른다. 내 삶만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공부는 다양하다. 경험이나 시련 속에서 성숙해지는 마음공부도 있고 보편적 지식을 쌓는 주요한 통로인 제도교육을 통한 공부나 시험을 위한 공부도 있고 비제도권적인 또는 개별적인 차원의 공부도 있을 것이다.

이중 마음 공부는 너무 포괄적이라 제외하고 그냥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틀에 맞추어서 공부를 생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공부이다.

다들 그렇겠지만 참 지겨웠다. 대규모 집단생활을 12년씩이나 연속으로 하는 것도 힘들고 지겨웠고 그 속에서 요구되는 공부는 더욱 재미없었다. 공부하기 싫어 몸을 뒤틀면서, 수업시간에 만화를 그리고 도시락 몰래 먹고 친구들과 히히덕거렸다.

고 3 때는 잠깐 조는 수준이 아니라 수업의 반은 잠으로 메우려 했었다. 그러다 선생님께 혼난 것도 부지기수다. 가끔 선생님이 하시는 말에 꼬리를 잡거나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은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하고 한동안은 수업시간마다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통 틀어 몇 시간 정도로 밖에 기억되지 않는, 원리를 가르쳐주던 몇몇 선생님의 흥미 있던 수업을 제외하면 12년을 하루 4시간에서 10시간 가량 한 자리에 앉아 그냥 날로 고역스럽게 시간을 때웠다고만 느껴진다.

그래도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중 1 때 과학수업이다. 중 1때 과학 선생님은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 차분히 과학의 기초개념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원리와 개념을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는 새로운 차원의 문리가 트이는 기쁨을 느꼈다.

성적은 투자하는 시간이나 수업태도에 비해서 많이 좋았는데 한 줄의 글이라도 꼭 자기화하는 습관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옆에서 누가 도와준다고 설명을 하면 산만해지기만 해서 그 시간에 혼자서 알아야 할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했다.

또한 일정수준의 성적순위는 유지하고 싶은 자존심과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는 강했다. 놀면서도 시험에 필요한 지식습득은 뒤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줄타기식의 균형감각은 간신히 유지했지만, 가치 없는 공부를 성공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허무주의적인 자의식에 괴로워하기도 했던 기억도 난다.

1982년에 입학했던 대학교 시절의 공부는 제도교육 내에서보다는 주로 운동권서클에서 선배와 친구들과 했던 세미나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자잘한 지식축적보다는 세상을 보는 가치관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처음 책을 읽은 후 발제하고 토론하는 세미나 형식을 접했고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기회도 가졌었다. 똑똑해 보이고도 싶고 선배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도 컸지만 빈번히 선배들의 잘 훈련되어 다져진 듯한 반론에 논리 진전이 막혀버리고 흐지부지 수긍하면서 끝나곤 했었다.

특이한 것은 형식도 새롭고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의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고 참 지식을 쌓아나간다고 믿을 만큼 내용도 새로웠던 그 시절에 지적 즐거움을 느꼈던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논리를 찾기 보다는 주어진 지식을 따라잡기도 힘들어 늘 안개 속을 막연히 헤매는 기분이었다. 무게 잡는 선배들 앞에서 주눅이 들었고 핵심 언더서클의 동기들보다 이론적으로 뒤떨어지고 있다는, 주변부에 속한 자의 열등감도 자주 느꼈다.

무엇보다도 치열했던 이론논쟁에서 무엇이 더 옳다고 판단할 근거를 찾지 못하면서도 옳은 편을 찾고 주장하고 실천해야 하는 데서 오는 지식의 공허함에 힘들어했었다. 자기화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채 운동을 하지 않는 과 친구들이나 세미나를 같이 하는 후배 앞에서는 선배나 앞선 동기와 똑같은 용어를 쓰면서 권위를 갖고 가르치고 싶어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도 앵무새 같은 수준의 지식의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내심 불편해 했었다.

이론에 대한 미진함을 메우고 독립적 지식체계와 사고능력을 갖고 싶은 목마름에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답했던 기간은 노동운동을 이유로 구속되어 1986년 6월부터 87년 7월까지 살았던 교도소에서였다.

특히 의정부교도소 시절에는 벽에 등을 대지 않은 채로 식사와 운동 그리고 취침시간외에는 계속 책을 읽었다. 환경이 산만하지 않아 잡념 없이 책을 읽는데 전념했던 시절이었다. 책을 읽고 역瑛?지식을 쌓아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그때 무척 많이 읽었던 근대사 책의 내용이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현재 학자로 사는 데 기초다지기의 의미는 있었겠지만 자신의 논리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는 않은 지식이 나의 기억과 의식의 세계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외국에 유학까지 하면서 여성학을 하려했던 것은 학자로서의 꿈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고(사실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제도교육 안에서 못 다한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교도소에서 가졌던 이론적 능력을 고양하고 싶은 운동가적 욕구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었다. 다만 답답했다. 커져가기만 하던 나의 여성적 자의식을 분석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여성적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지,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고민은 왜 늘 냉소거리가 되는지, 여자로서 겪는 부당함을 이야기하면 개인주의적이고 덕이 부족한 인간으로 규정되는지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물론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충실히 이 질문에 대한 답만을 찾을 수 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일단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기초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었다.

영어도 너무 부족했고 공부하는 내내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낯선 미국의 제도나 문화 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정착을 해야 했고 이를 위해 공부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한번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처지가 되어 보지 못했고, 영어도 쉽게 늘지 않아 세미나에서 토론을 즐기지도 못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의 지도교수와의 만남과 과목 이수를 위해서 써야 했던 많은 기말페이퍼나 학위논문의 집필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재미있었다.

지도교수는 항상 나의 문제의식에 눈을 반짝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내가 한 말의 한 부분도 허술히 넘기지 않고 다음 주에 만나면 “네가 지난 주에 말했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말이야” 라면서 그 주제에 대한 자기생각을 이야기했다.

늘 나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진전시켜 볼만한 자극을 받곤 했다. 논문을 쓸 때는 자기 논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다른 주장이나 논리에 대한 이해력도 같이 증가함을 느끼면서 즐거워했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거나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이의 책을 읽을 때 저자의 본래의 뜻이 훨씬 더 잘 이해가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꿸 수 있는 실로서의 나의 문제의식과 시각이 있어야 다른 이들의 주장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지식의 자기화의 과정은 나에게는 여성학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답을 찾고 싶은 절박한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이 고통을 동반한 삶의 경험 속에서 왔기 때문에 말이다.

인생의 계기마다 공부를 선택했으면서도 공부하면 하기 싫은 것이라는 감정이 먼저 든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느낌의 압도적 영향력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싫어하던 공부를 통해 꽤 많은 삶의 문제를 해결해왔으니 마음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공부를 좋아하는 마음이 늦바람 같이 세게 불어 교수라는 직업에 보다 충실할 수 있게 된다면 더욱 좋겠다.

권인숙 교수는

권인숙 명지대 교육학습개발원 교수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개인의 고통을 극복하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 군사독재정권의 추악상을 알리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1964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82년 서울대 의류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이어 85년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89년에는 서울 구로동에 노동인권회관을 세워 상담 교육활동을 하였다.

94년부터 여성학 공부를 시작, 미 럿거스 대학에서 석사를, 클라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컬럼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초청연구원을 지냈다. 남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다 2003년부터 명지대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있다.

학자로서 그는 한국에서 군사주의나 민족주의가 보편화하면서 여성이나 소수자의 인권이 억압되는 과정을 탐색하고 있으며 그런 사색을 담은 책 ‘대한민국은 군대다’를 최근에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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