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 전 주미대사의 퇴임 후 행보가 영 개운치 않다.
홍 전대사는 23일 워싱턴 주미대사관에서 이임식을 하면서 “남은 업보가 있다면 회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997년 대선 당시 삼성그룹의 정치자금 ‘심부름’에 관여했던 과거에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유학중인 자녀와 지인들을 만난 뒤 수주 후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7월 하순 안기부 X파일 사건이 불거진 직후 정부는 홍 전 대사의 경질 방침을 확정했고, 이후 주미 대사 자리는 사실상 유고 상태였다. 사실상 두 달 간의 퇴임 준비 기간을 가졌던 것이다.
귀국을 미룬 홍 전대사의 태도는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되고, 사건의 폭발성이 여전한 지금 귀국해봐야 득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리한 시기에 서울로 돌아오겠다는 발상은 결코 공직자의 처신으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업보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천정배 법무장관이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홍 전 대사가 미국에 장기 체류한다면 외국 사법기관과 공조해 귀국토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할 만큼 홍 전대사 문제는 정부에 부담을 주고 있다.
대사 공석으로 주미 한국대사관은 미 행정부 고위인사들과 워싱턴 주재 외교사절들을 초청해 매년 성대히 벌여오던 개천절 리셉션 행사도 취소했다. 외교적 손실이다. ‘2005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준비위원회’는 이를 문제 삼아 외교부를 항의 방문할 예정이다. 이런 일만 봐도 홍 전 대사의 업보는 결코 작지 않은 듯하다.
정치부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