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를 극대화하는 것은 사진에서 낯설게 만들기의 오랜 전략이다. 하찮은 곤충 한 마리도 수천, 수만배로 확대해놓고 보면 우주의 신비를 담은듯 경이롭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가 김홍주씨의 꽃그림도 언뜻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연분홍 거대한 꽃잎 하나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장미나 연꽃 같기도 하고 그냥 잎새 같기도 하다. 분홍의 바다에 보일 듯 말 듯 섬세하게 뻗은 잎맥들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린다. 그러나 회화의 유희성을 추구해온 작가는 사진의 전략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극대화해서 오히려 단순해보이는 그림 앞으로 다가서면 일순 시각을 압도했던 이미지는 사라진다. 실낱처럼 가는 붓자국을 촘촘히 이어서 만들어낸 그림 속의 숨겨진 길들이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가장 가는 아크릴 붓으로 수없이 가필한 흔적들은 켜켜이 쌓인 시간성과 손에 잡힐 듯 촉각적인 매력을 부여한다. 작가는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화가의 손 맛 또는 시간의 공정이라는 회화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로댕갤러리에서 열리고있는 ‘김홍주-이미지의 안과 밖’전은 오랜만에 그림보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는 전시다. 김씨는 1970년대 초반 한국화단에 전위적인 개념미술을 전파하는 선봉대였던 S.T.그룹의 일원이었으나 70년대 중반 개념미술의 공허함을 지적하면서 극사실주의로 선회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풍경 인물 글씨 등 다양한 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 여백과 부감법(위에서 내려다본듯한 시점)의 활용 등을 통해 회화의 재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에 천착했다.
‘꽃 속에서 우주를 보다’는 부제를 단 이번 전시는 이런 작업의 연장선에서 90년대 후반이후 세필작업을 통해 집중해온 회화의 평면성과 이미지의 관계를 결산한다. 극도로 가는 붓으로 수없이 가필해서 작업한 꽃 그림들이 중심이다.
“꽃을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리고있는 것이 꽃이 아니라 길이거나 강이거나 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주 가는 세필로 촘촘히 작업하다보면 부분만 보이거든요. 결국 전체를 보는 것과 부분만 보는 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시점의 문제입니다.”
교묘하게 의도된 실재와 이미지의 충돌, 혹은 배반은 회화의 유희적 성격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평면의 그림 속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꽃잎의 섬세한 잎맥을 좇던 시선은 어느새 촘촘한 붓질이 품고있는 밭이랑이며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흐른다.
전시를 기획한 삼성미술관 박서운숙 큐레이터는 “부분에서 출발해 조금씩 전체로 커져 나가는 그리기의 반복을 통해 꽃의 이미지는 생성되는 동시에 소멸한다. 그 과정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 보는 관객의 능동적 그림보기를 통해 체험하게 하는 것이 김홍주식 회화의 묘미”라고 말했다.
전시는 10월30일까지. (02)2259-7781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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