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6자회담의 공동성명을 옥동자 탄생이라며 들뜨는 것은 성급하다. 모호성을 접착제로 임시 봉합한 의견 차이들, ‘말 대 말’의 약속을 ‘행동 대 행동’으로 구체화해 가기까지의 지난한 과정 등을 감안할 때 공동성명 채택만으로 하나의 완결된 생명체가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굳이 임신출산 과정에 비유하자면 공동성명 채택은 착상(着床)에 성공한 단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공동성명의 의미를 깎아 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착상 단계를 거치지 않는 옥동자 탄생은 없다. 이번 공동성명은 북핵 문제의 최종 해결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다.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정의 임신이 주위의 축하를 받듯이 9ㆍ19 공동성명도 축하 받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현단계에서 공동성명의 불완전성을 들어 유산 가능성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北무리수 ‘안정’ 해쳐
착상 후 3개월까지가 유산 위험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임신부는 절대적 안정을 취해야 한다. 5차 6자회담이 열리기로 돼 있는 11월 초가 공동성명 발표 후 3개월 이내에 해당한다는 것이 공교롭다. ‘행동 대 행동’의 단계로 무사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6자회담 참가국들이 이 기간에 상호신뢰를 키우는 등 절대적 안정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이 공동성명 발표 후 하루가 채 안돼 공동성명 내용과 배치되는 외무성 대변인담화를 발표하고 나섰다. 이는 공동성명의 유산을 피하기 위해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노력과는 거리가 먼 난폭한 행동이다. 북한의 선(先) 경수로 제공 요구는 조속한 시일 내에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안전협정에 복귀하겠다는 약속과 부합하지 않는다.
북한이 이처럼 무리수를 두고 나선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공동성명 발표 직후 열린 6자회담 전체회의에서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은 경수로 제공 논의의 ‘적절한 시기’를 핵 폐기 이행 및 NPT 복귀 이후로 못박았다고 한다.
이는 가까스로 공동성명 합의를 가능케 했던 ‘창조적 모호성’을 깬 것이고 북한은 다음날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경수로 제공 후 NPT복귀라는 입장 천명으로 즉각 반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소동과는 별도로 북한이 지나칠 정도로 경수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너지 자원이 절대 부족한 북한에 경수로는 에너지 자립의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약속 이행을 담보하는 카드 확보로서의 의미가 더 커 보인다. ‘신뢰조성의 물리적 기초인 경수로’라는 그들의 표현이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은 핵 카드를 완전히 놓아버리면 미국의 관심권에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대미 적대의존은 김정일 체제에 끊기 어려운 마약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대미 적대의존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미국의 대북 불가침을 문서화한 6자회담의 공동성명이 바로 그 증거다.
●‘對美신뢰’ 발상 전환해야
북한이 이번에 모든 핵과 핵 프로그램의 전면폐기 약속이라는 결단을 했지만 미국도 많은 것을 양보했다. 북한은 이제 대미 적대의존이 아니라 대미 신뢰로 생존하는 발상을 할 필요가 있다. 끝임 없이 새로운 대미 적대 카드를 만들어 양보를 얻어 내려 하지 말고 과감한 양보로 의표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동성명 발표 다음날 경수로 선 제공 주장으로 국제사회의 환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아니라 영변 5MW 원자로 가동 중단 등을 깜짝 선언하는 식이다. 이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광폭정치, 광폭외교에 어울리는 방식 아닌가.
앞으로 ‘행동 대 행동’의 협상 단계에서도 지루한 줄다리기로 진을 빼지 말고 한발씩 앞서 간다면 국제사회를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뢰가 쌓인다면 북한이 경수로를 얻는 시기가 훨씬 앞당겨질 수 있다. 북한이 정말로 경수로를 필요로 한다면 그게 지름길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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