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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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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입력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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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군주와 정부는 개혁 곧 근대화를 하기에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선진 일본의 도움과 보호가 불가피하다.’

20세기 초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이런 것이었다. 일제 총독부는 학자들을 동원, 한국은 잦은 침략과 지배를 받아 타율적 성격이 강하고 두 사람만 모여도 싸움질을 할 정도로 당파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발전할 수 없는 나라라는 논리를 확산시켰다.

하지만 해방 60년이 된 오늘까지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일본인이 있으며 심지어 우리 사회에도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는 그런 주장에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책이다. 그 논리가 얼마나 엉터리이고 근거 없는 지를 실증적 자료로 입증한다. 저자는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 2004년 6월 24일부터 7월 15일까지 일본 도쿄대 학생들을 상대로 한 특강을 모은 것이다.

책이 강조한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이 그렇게 못났다고 몰아붙인 조선 왕조가 사실은 무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한국 침탈이 불법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책은 조선 왕조가 백성의 의식주 향상에 노력을 기울였고 국가 이념인 유교는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조선말 일본이 강조한 유교망국론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백성의 생활이 궁핍했던 16, 17세기 조차도 자연재해와 생산력 저하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에 왕실의 무능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니라고 옹호한다.

18세기를 넘기면서는 군민일체론(君民一體論) 등 나라의 주인이 왕과 백성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그에 따른 민중의 능동성이 크게 고양됐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1876년 개항 이후 정부는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전개했다. 특히 18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한 뒤 정부가 취한 개혁 정책은 놀라운 것이었다. 근대교육, 근대금융제도를 들여오고 서울 도시계획을 추진한 것도 이때다. 전차가 거리를 달린 것은 서울이 도쿄보다 3년 앞선다.

일본은 적지않게 당황했다. 고종 대에 이뤄진 개혁 작업이 짧은 시간에 상당한 성과를 내자, 이를 방치하면 한반도 장악이 어려워 질 것으로 판단해 조기 박멸책을 써 국권을 탈취했다.

이 과정은 불법의 연속이었다. 1904년 의정서부터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이르는 다섯 개의 한일 체결 조약 가운데 비준을 받은 것은 마지막 조약 하나 뿐이었다.

정식 형식을 갖춰야 할 중요 조약이었으나 마지막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약식 형식을 취했다. 한일병합조약에도 문제가 있다. 병합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조칙에, 어새(御璽ㆍ임금이 사용하는 행정용 도장)만 찍혀 있을 뿐 순종의 이름자 서명이 빠져있는 것이다. 이름자 서명은 일본이 요구해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필요한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저자는 “불법의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한국병합은 무효이고 아예 성립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불법은 이것뿐이 아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일본군이 무단 상륙, 경복궁에 진입한 것도 그렇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그렇다. 통감부 직원들은 순종의 서명을 위조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런 내용의 강의를 듣고 도쿄대 학생들이 당황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두 나라 관계사에 이렇게 문제가 많은 줄 몰랐고, 일본 근대 국가 형성의 중요 인물들이 한국에 한 짓을 알게 되면서 역사상이 흔들린다는 말도 했다.

독자에 따라서는, 수긍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당하고 끝내는 나라를 잃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음에도, 왕실을 지나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유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도 너무 호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 근대사의 여러 가능성이 일본의 침략주의에 의해 좌절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이 한 세기 전 우리 선조가 자력으로 설치한 전기와 전차를 모두 일본이 해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는 한국인이 먼저 들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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