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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자두 - 닫힌 세태서 끄집어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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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자두 - 닫힌 세태서 끄집어낸 '가족'

입력
2005.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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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순(47)씨는 그리 알려진 작가가 아니다. 등단(1994)한 지 10년이 넘었고 지난 해 이효석문학상을 받았지만, 이제껏 단 한 권의 책도 자기 이름으로 낸 적이 없다. 그가 문학상 수상작인 ‘자두’ 등 7편의 단편과 등단작 ‘떠도는 혼’(중편) 등을 묶어 작품집 ‘자두’를 냈다.

과작(寡作)이 그 자체로 작품의 밀도나 깊이를 보증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긴장을 이완시키고 문제의식을 무디게 하기도 한다. 더욱이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작품을 발표하기란, 기회의 측면으로나 대타적 자의식으로나, 그만큼 힘든 일일 것이다.

우선 주목되는 점은, 그의 문장과 문체다. 문학이 글의 벼림과 부림의 예술인 한, 문장과 문체는 그 형식의 토대이자 뼈대다. 표제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샘뜰네는 무두질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 안의 불을 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은 속도 없이 휘영청 밝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어 보니 동녘에 보름달이 둥실 올라 있다. 그믐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세월은 저대로도 잘 흐른다. 그네는 갑작스레 허갈이 들어 침을 삼킨다.

보름달에 허기라니, 어이가 없다. 세상만사, 인생사 돌아가는 게 제멋대로이더니 이제 몸뚱이마저 제멋을 부리는가.”(9쪽) 소박한 듯하지만 단어 하나 하나를 골라 ‘무두질’한 듯 다듬어놓은 품새가 엿보인다.

“그네는 끙, 하고 돌아눕는다. 달빛도 애잔하게 샘뜰네를 좇아 그네의 사시랑이 가슴으로 풍덩 뛰어든다. 오랜만에 집에 혼자 누워 있자니 살아온 세월이 등뼈 마디마디에서 슬몃슬몃 피어난다”(14쪽) ‘10년 공백’의 공력을 느끼게 하는, 정련된 문장과 감칠맛 나는 표현들을 좇아가는 재미가 있다.

작품의 인물들이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조선족 불법체류자나 청년실업자(‘동거인’), 재사할린 동포(‘떠도는 혼’) 성적 욕망의 노예들(‘팬츠는 집을 버렸는가’).

그들이 속한 생활의 단면들, 가난 소외 소통부재 외로움 가정파탄 자살 등도 새삼스럽다 할 만큼 낯익다. 그들은 대개 “한쪽 더듬이를 잃은 곤충처럼 비칠거리며” “폐를 다 비워내는 듯한 한숨”(‘떠도는 혼’)을 달고 산다.

“내 삶에 어깃장을 놓”듯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길목’),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차고 넘치는, 과잉된, 과장된, 주체 못할 기운들”의 ‘과부하’에 버르적거리기도 한다(‘팬츠…’).

캐릭터와 갈등의 계기들이 새롭지 않다는 것은 소설, 특히 첫 작품집의 인상으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작가는 한 술 더 떠, 자살 클럽에 가입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화자로 하여금 “등만 돌리면 바로 삶의 길목”이라거나 “난 어떻게든 살아 볼 거다” 다짐하게도 하고, 발정 나 집을 나간 애완견 ‘팬츠’의 귀가를 끝까지 기다리게도 한다.(소설에서 ‘팬츠’의 가출은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궤도 이탈을 상징한다)

서사와 테마만을 도식화해 보자면 ‘계몽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가정 등 전통의 가치와 도덕 사회ㆍ역사 의식이 문학의 변방으로 내몰리고, 개별자의 닫힌 내면과 환상이 젊은 문학의 표징처럼 통하는 시절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문장을 제쳐두더라도, 너무나 당연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혹은 당위와 현실의 괴리 자체가 당연시 되는 아이러니를 말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를테면 그것은 이 즈음의 문학적 유행에 대한 그의 어깃장 같은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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