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는 경수로 문제 등과 관련한 회담 공동성명의 모호한 내용에 대해 ‘창조적 모호성’이라고 했다. 현대 외교 무대에서 실용적 전략의 하나로 심심찮게 보게 되는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의 개념에 빗대 회담 성과를 설명한 것이었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중요 쟁점이나 현안에 대해 의도적으로 명확한 입장을 정하거나 밝히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충돌이나 갈등을 피하고 당장의 실리를 도모하는 외교 전략을 말한다.
■회담 주역으로서 공동성명의 모호성을 ‘창조적’이라고 표현한 진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향후 이 성명이 몰고 올 어려움이나 파장 정도는 충분히 예견하고 있음은 잘 알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이 성명이라면 더 이상이 있을 수 없는 최고의 합의라는 자기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관료인 그가 학문적 정의에 스스로 ‘창조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도 그는 성명을 도출하기까지 자신이 핵심적 ‘활약’을 한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다만 그 모호성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북한 수석 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성명에 합의하면서 상부에 어떻게 보고했을지도 궁금하다. 아마도 경수로 문제를 문안에 명시했으니 핵 무기와 계획을 ‘포기’한다고 해도 충분한 실리와 명분을 챙긴 성공이라고 보고했을지 모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리 알고 성명을 용인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성명 발표 다음 날 ‘경수로 제공 없이 핵 포기 없다’고 한 외무성 담화가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 엉뚱할 일도 아니다. 다만 김 위원장이 회담을 이렇게 읽고 있다면 방향전환을 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북한의 계산이 어디까지 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관료조직 생리 로 보면 경수로 문제가 좌절됐을 때 이는 김 부상의 책임 문제로 갈 수 있다. 미국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크리스토퍼 힐 국무성 차관보가 핵을 포기시켰으니 경수로 문제를 적당히 언급해 줘도 된다고 보고했을 미국 쪽 논의 역시 결국은 관료들의 작업이다.
윗선에 이루어진 관료의 보고는 후퇴를 못한다. 설사 잘못을 알더라도 책임을 지고 이를 시인하는 법이 없는 게 관료의 속성이자 관료제의 역기능이다. 하루 만에 탈이 난 회담 성명을 두고 당국자들의 자찬이 과도한 것 같아 해 보는 말이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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