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소리로 오는 것 같다. 물론 사람마다 계절을 느끼는 방법은 다르지만. 어릴 적 집에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 그때는 오동잎에 바람 드는 소리로 가을이 왔다가, 잎이 떨어져 바람에 쓸리는 소리로 가을을 보내곤 했다.
이처럼 오동잎에서 가을을 표현한 분으로 주자가 있다. ‘소년은 늙기 쉽고…(少年易老學難成…)’로 시작되는 유명한 ‘권학시’에서, ‘섬돌 앞 오동잎 벌써 가을 소리(階前梧葉已秋聲)’라는 구절을 보면서 참으로 공감한 기억이 있다.
어떤 이는 가을은 풍성한 계절인데, 쓸쓸해 하고 우울해 하는 것은 동양의 정서가 아니라 서양의 풍조를 모방한 것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당나라 유장경이 쓴 ‘감회(感懷)’의 한 구절을 보자. ‘가을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니 서글픔을 금할 수 없네. 저 노란 국화는 아직도 피어 누구를 기다리는가(秋風落葉正堪悲, 黃菊殘花欲待誰).’ 필자는 이 구절 후반부에서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런 글을 보면 가을의 애상이 서양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말은 수긍하기 힘들다.
풍요로운 수확 앞에서 오히려 깊은 상념에 빠질 수 있는 동물이 인간인 듯하다. 예부터 가을에 마음이 움직여 글을 쓴 이가 적지 않다. 그 중,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는 참으로 명문이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무정한 초목도 가을이 되면 낙엽 되어 떨어진다. 하물며 사람은 온갖 근심이 마음을 흔들고 번다한 일들이 몸을 수고롭게 한다. 게다가 자신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것을 하려 하고, 지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니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스스로 늙는 것이지 어찌 가을 소리를 탓하겠는가. 결국, 가을이란 것이 만물을 시들게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늙는 것이 어찌 가을 탓이랴.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이 ‘추성부’를 평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명예의 고삐에 매이고 감정의 물결에 일렁이며 욕심의 불에 시들어 스스로 몸을 해친다. 이 글의 뜻은 사람이 스스로 반성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기야 가을은 늘 그렇게 오고 가는 건데 사람이 하릴없이 한탄만 하는 것 같다.
가을에 깊어 가는 상념과 점점 더 느껴지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하여, ‘하늘이 만약 감정이 있다면 하늘도 또한 늙을 것이다(天若有情天亦老)’라는 시구만이 사람이 자연과 세월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항변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성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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