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라리 손대지 말지” 절경이 폐허로
천혜의 자연경관, 해금강이 ‘초대’한 그곳에는 잡초더미밖에 없었다. ‘하늘과 산, 바다가 함께 있는 관광 거제의 메카’라는 장밋빛 청사진를 내걸고 야심차게 추진한 해금강 집단시설지구 조성사업은 관련 법규 검토조차 하지 않은 정부의 주먹구구식 사업 추진으로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했다.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의 대표적 프로젝트이자 전국 최초의 관(官) 주도 시설지구 조성사업으로 주목받았던 이 사업은 손만 뻗으면 해금강(국가지정 명승2호)에 닿을 듯한 지척의 거리인 경남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9의2 언덕배기 1만2,000여평에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상업시설 등을 유치한다는 것이 내용이다.
거제시는 2000년부터 전체 사업비 429억2,000만원 중 숙박시설 5필지(3,695평)과 상업시설 8필지(1,636평)에 300억원의 민자를 유치키로 하고 지난해 4월까지 국비 44억과 지방비 등 100여억원을 들여 도로와 주차장, 광장, 조경ㆍ전기ㆍ통신시설 등 공공부문 시설공사를 준공했다.
하지만 7월 이 사업의 핵심인 숙박ㆍ상업시설 유치를 위한 용지 분양에는 단 1건의 응찰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제시는 이달 22일 재입찰 공고를 냈으나 여전히 문의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 또 다시 유찰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현장은 관광의 메카가 아니라 폐허를 닮아 있었다. 4월 준공된 사업예정지구 내 반듯하게 닦인 2차선 아스팔트 도로는 곳곳이 움푹 패여 토사가 넘치는 황톳길로 변했다. 보도블록에는 잡초가 쭈뼛이 고개를 내밀고, 곳곳에는 해풍을 못이겨 자빠진 후박나무가 뒹굴면서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연시설로 조성된 돌계단에도 이끼가 끼었고, 주차장 곳곳에는 쓰레기가 넘쳐난다. 숙박ㆍ상업시설 예정지구에는 건물 대신 이름모를 온갖 잡초들만 무성해 ‘부도 난’ 혹은 ‘실패한’ 사업 현장임을 알게 했다.
해금강마을 이장 김옥덕(52)씨는 “꿈에 부풀어 두 말 않고 토지 보상에 응했는데 이제 와서 주민들에게 돌아온 것 절망감과 넘쳐나는 쓰레기뿐”이라며 정부의 탁상행정을 질타했다.
어촌계장 김홍근(51)씨는 “세상에, 바다에 무슨 조망권이 있다고 명승지와 인접했다는 이유로 3층 건물밖에 짓지 못하게 하니 누가 입주하려 하겠느냐”며 “이건 법이 아니라 횡포”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 지역은 현행 자연공원법 적용대상지로 건물 층수제한이 5층 이하로 돼있지만, 명승지인 해금강에 인접한다는 이유로 문화재관리법도 동시에 적용받아 3층 이하의 건물밖에 지을 수밖에 없다.
또 숙박시설의 용도도 호텔, 여관, 모텔 등으로 한정돼 가족호텔과 콘도의 건립은 원천봉쇄됐다.
여기에다 입찰 방식도 용도ㆍ필지별 분양이 아닌 사업예정지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은 일괄분양 방식을 채택해 사실상 민간투자자들의 투자 의지를 꺾어버렸다.
‘응찰률 제로’는 예견된 결과였던 셈이다.
거제시 관광시설계 이재현 계장(46)은 “해금강지구 사업만 해도 자연경관만 놓고 보면 전국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지만 적용되는 개별법규만 족히 10여개에 달하다 보니 애초부터 정상적 사업 추진은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낙후된 거제 관광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이 사업의 조기 완공이 절실한 실정”이라며 “천혜의 관광자원을 방치해두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마이너스”라고 덧붙였다.
사업 표류에 따른 주민, 시의회의 질타가 쏟아지자 거제시는 지난해 4월 정부에 건물층수 제한을 현행 3층에서 4층으로 완화하고, 가족호텔 및 콘도를 지을 수 있도록 공원계획 변경요구 신청을 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시는 고육지책으로 최근 재입찰 공고에 앞서 55대 기업체에 안내 팸플릿을 발송하고 대도시 향우회까지 눈물겨운 홍보활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부의 8ㆍ31 부동산투기 대책의 된서리를 맞아 난항이 예상된다.
2006년말로 예정된 공사 완공을 불과 1년여 앞둔 해금강 집단시설지구는 활기와 부산함 대신 짙개 드리운 해무(海霧) 속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을 벌여놓은 정부가 끝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부가 법 타령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하는 주민들의 원성이 가득했다.
거제=글ㆍ사진 이동렬기자 dylee@hk.co.kr
■ 남해안 중복개발 실태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사업이 예산만 잡아먹는 ‘밑 빠진 독’으로 전락한 것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개발사업의 중복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감사원은 지난해 6월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에 대한 감사를 벌여 “개발계획 수립 단계에서부터 타당성 검토가 미흡했다”는 감사결과를 내놓았지만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가 2009년까지 국고 5,188억원을 지원하는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사업은 모두 64개. 이중 ‘공룡’을 주제로 한 사업은 대표적인 중복투자 사례로 꼽힌다.
“남해안 관광벨트가 공룡벨트냐”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백악기 공룡테마파크(경남 고성), 비봉공룡공원(전남 보성), 자연사박물관(목포), 우항리 공룡화석지 학습장(해남) 조성에 소요된 사업비만 무려 1,497억원에 달한다.
무분별한 관광단지 개발도 예산 낭비를 부추긴다. 경남 남해의 남해하모니리조트 개발과 가족휴양촌 조성은 사업 성격이나 개발 개념이 사실상 한 가지다. 해수풀장 등 대규모 해양휴양시설이 들어서는 해남 땅끝 관광지와 우수영 관광지, 화완관광단지 조성사업은 같은 지역에 무려 3개의 관광지를 세우겠다는 것으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이처럼 비슷한 테마의 중복개발은 예산낭비 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 효과 등에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전남도의 경우 중복개발의 부작용을 우려해 뒤늦게 여수와 보성, 해남의 공룡 테마 개발사업 규모를 조정하고 개발 방향을 지역별로 차별화하기로 했다. 또 일선 자치단체가 신청하는 각종 개발사업 계획을 사전 검토해 중복 개발을 막기로 하는 등 자구 노력에 나섰지만 어느 정도 효과를 볼지는 미지수다.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사업의 이미지 실추는 융통성 없는 국고보조금 사용 제한에서도 나타난다. 일선 지자체들은 “정부가 돈을 주면서도 토지보상비 등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해 오히려 지자체의 지방비 부담을 늘려 놓았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전남도의 한 관계자는 “개발사업에 가장 중요한 부지 확보에 돈을 쓰지 말라고 하니 어떻게 사업을 추진하겠느냐”며 “결국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의 지방비 부담이 가중되고, 재원이 확보될 때까지 추진도 못해 사업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진도군은 지난해 4월 아리랑마을 조성사업을 하면서 국고보조금 13억여원을 토지매입비로 사용했다가 감사원 감사에서 들통나 부족예산을 지방비로 메워넣기도 했다. 보성군도 비봉공룡공원 사업에 따른 기본계획 용역을 발주하면서 국고보조금 4,400만원을 사용했다가 부당성이 지적돼 관련 예산을 다시 지방비로 보충했다.
더구나 내년부터는 해당 지자체에 일정 비율로 지원되던 국고보조금이 사라지고 대신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로 사업비를 지원하게 돼 지자체의 사업비 확보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국책사업 지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것도 걸림돌이다. 경남도 관계자는 “현재 남해안관광벨트 개발사업을 추진하려면 행정절차를 이행하는데만 일반 사업과 다를 게 없이 3~4년이 걸려 민자 유치에 애를 먹고 있다”며 “조속한 사업 추진을 위해서는 행정절차 간소화와 민자유치 활성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 중복개발 왜 일어나나
1조원 이상의 혈세가 들어가는 남해안 관광벨트가 비슷한 공원들이 늘어선 ‘중복벨트’가 되고 있는 이유는 종합계획 없이 자치단체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행 법과 제도 아래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의 경우 종합 계획과 장기적 안목으로 사업을 추진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관광 벨트라는 큰 그림은 문화관광부가 그렸지만 시ㆍ군ㆍ구 등 기초자치단체가 모자이크식 개발 계획을 세워 제각각 추진하고 있다. 현행 관광진흥법 상 사업 주체는 시장 군수 등 기초자치단체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시장 군수들은 임기 내에 뭔가 보여주겠다는 생각만을 앞세울 뿐 치밀한 계획이나 장기 투자에는 큰 관심이 없다. 국고를 받아와 단기간에 보여줄 수 있는 전시행정적 사업에만 골몰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지자체와의 협의나 조정은 당연히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중복 투자가 다반사다. 조정을 해야 할 문화부는 법적으로 사업주체가 지자체라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 남해안 벨트의 경우 4개 시ㆍ군이 각각 공룡테마 공원을 만들고 있는데도 문화부가 조정에 나서지 않았다. “시ㆍ군이 간섭하지 말라고 항의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게 문화부측 답변이다.
종합적 조정기능이 없다 보니 당연히 거쳐야 할 타당성 검토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남해안 관광벨트 내에 추진되는 64개 사업의 대부분이 관광 수요 등 예비 타당성 검토가 부실했다는 것이 열린우리당 이경숙 의원의 주장이다.
수익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사업도 적지않고, 환경 파괴가 우려되는 사업도 버젓이 시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해외관광객 유치는 물론이고 국내 관광객 유치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그간 쏟아 부은 예산만 낭비한 채 방치되고 있는 사업이 소속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방치되거나 취소되는 사업이 속출할 것으로 전망된다. 민자 유치도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수익성이 보이지 않는 사업에 민간이 투자할 까닭이 없다.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고 관광개발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초자치단체가 개발사업을 계획, 추진하는 현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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