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운명’(제작 영화사 봄ㆍ감독 박진표)에서 노총각 철중(황정민)과 다방 레지 은하(전도연)는 트럭을 타고 자동차 극장에서 가서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본다.
유지태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며 둘은 사랑이 변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한참 말다툼을 벌인다. ‘너는 내 운명’은 ‘봄날은 간다’가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사랑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순정이라는 말이 도무지 통할 것 같지 않은 2005년에 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통속적인 신파 멜로영화가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현실 속으로 이야기를 끌어 올린 박진표 감독의 현실 감각이다.
다큐멘터리 PD 출신으로 노부부의 성과 사랑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죽어도 좋아’를 연출했던 그는 굳이 ‘신라의 달밤’과 ‘봄날은 간다’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2001년 속에서 영화를 전개한다.
영화 속 모든 설정은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은하는 백혈병처럼 순결한 느낌의 병이 아닌 현대의 천형이라 불리는 에이즈를 앓고 있고, 티켓다방에서 일하다 사창가까지 흘러가는 닳고 닳은 여자다.
석중은 여자를 만나러 필리핀까지 갔다 왔을 정도로 결혼에 안달 났던 상태였으며, 인터뷰에 응하면 구속된 은하가 풀려날 수 있다는 기자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 짜증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이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잔인한 현실은 역설적으로 순정을 우리 곁으로 불러 온다.
배우들의 질감 있는 연기도 ‘너는 내 운명’을 신파극에 쏟아질 법한 흔한 비난에서 벗어나게 한다. 수감된 은하를 만나러 간 석중이 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유리벽 위에 달린 환풍기를 뜯어 내고 애타게 손을 내미는 장면을 보면, 머리 속으로는 분명 너무 오버 같고 신파답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슴이 머리보다 먼저 짠해 온다. 은하와 석중의 진심을 담아 낸 듯한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다. 때문에 영화의 모티프가 됐던 에이즈 걸린 채 수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윤락녀와 그를 기다리는 남편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영화 속 커플은 세상 어딘가에 실제로 살아 있는 듯 착각하게 한다.
사랑의 힘을 믿고 지켜 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가슴 한 켠에 숨겨져 있는 순정을 대책 없이 자극한다. 그래서 순정을 잃어버린 요즘 사람들에게 ‘너는 내 운명’은 위험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철중과 은하와 같이 사랑을 가로막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자신도 능력도 없으면서 맹목적으로 순정만을 믿는 건 위험할 테니 말이다. 23일 개봉. 18세.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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