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核폐기
공동성명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의 주장이 관철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 동안 미국은 제네바 합의 때 폐기 대상에서 제외됐던 과거 핵(물질)은 물론 현재 보유하는 핵과 미래의 핵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북한이 존재를 부인하는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HEU)을 염두에 두고 폐기 대상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의 핵 개발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 부동의 목표라는 게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합의문에 모호한 표현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아왔다.
반면 북한은 “평화적 핵 활동이 보장돼야 한다”며 핵 폐기 범위를 핵무기와 핵무기 관련 프로그램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혀왔다. 평화적 핵 프로그램의 여지를 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북미는 완강히 자기 입장을 고수, 접점을 찾지 못했으나 한국과 중국의 중재로 막판에 극적인 절충이 이뤄졌다. 양측은 북한의 모든 핵 폐기, 북한의 NPT 복귀, IAEA 사찰 수용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북측의 평화적 핵 이용권을 인정한다는 선에서 타협했다. 미국이 확실한 핵 폐기가 이뤄진다면 폐기 이후 평화적 핵 이용 문제에서 융통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북측으로서는 경수로 제공 논의 가능이라는 미측의 양보에 고무된 듯하다. 북한 내 핵시설 존재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경수로의 경자로 꺼내지 말라는 미국이 경수로 문제에서 한발 물러선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미국의 선(先) 핵폐기 주장에 반대했지만 경수로,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의 이득을 확실히 얻기 위해서는 완전한 핵 폐기에 동의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이번에도 핵 폐기 범위를 확정하지 못할 경우 6자회담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절박감도 북미 양측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핵 폐기 범위는 이행을 논의하는 다음 회담에서도 핵심 쟁점이 될 것이다. 구체적인 폐기 대상을 확정하는 다음 회담에서 범위를 최대한 넓게 잡으려는 미국과 범위를 좁히려는 북한의 입장이 다시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경수로와 에너지 지원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경수로 제공과 대북 중대제안 사이의 상충문제, 한국의 이중 부담 가능성이다. 공동성명은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한다’고 했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적절한 시점은 북핵 폐기를 되돌릴 수 없을 때”라고 말했다. 북핵 폐기가 사실상 종결돼야 건설 논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2~3년 후나 가능하다.
경수로 제공은 일단 대북 송전제안과 중복된다. 대북 송전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신포 경수로 건설 중단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북한이 전기도 받고 경수로도 받는 것은 아닌지, 한국은 두 부담을 모두 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200만㎾는 약속대로 송전한다”며 “이후 경수로 논의가 진행되고 경수로 공사가 마무리되면 전력제공은 그만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미뤄 정부 생각은 경수로 완공 전까지 송전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경수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른다는 상황판단이 있다. 당국자들은 경수로 문제가 백지상태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경수로 건설 방침 확정, 재원 분담, 장소 선정 등에 대한 6자 논의는 수년, 길게는 십년 이상 걸릴 수 있다. 북한의 경수로 요구가 다른 형태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그런 불확실한 기간 동안 대북 송전사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국자들의 설명과는 달리 한국의 이중 부담이 있을 수도 있다. 북측은 한국이 건설한 송전시설을 이용하고, 경수로로 발전을 하는 두 가지 이득을 챙길 수 있다. 한국은 경수로 건설에 비용부담을 하고, 경수로 완공 전까지 송전을 하는 부담을 안을 수 있다.
한편 북한은 이번 합의로 중유지원과 교역 및 투자에서의 경제 협력이라는 ‘현찰’을 챙겼다. 제네바 합의 당시 미측이 경수로 완공 전까지 50만톤의 중유지원을 약속했던 점으로 미뤄 5개국은 북핵 폐기 이행을 보면서 50만톤 안팎의 중유지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북한의 세계경제 편입을 제어했던 미국의 거부권도 점차 완화할 전망이다
■ 北美관계
북한은 핵 폐기를 약속하는 대가로 북미관계 정상화와 안전보장에서 적지않은 수확을 얻었다. 공동성명은 북미는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 공존하며,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고 밝히고 있다. 금년 초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폭정의 전초 기지’로 언급한 뒤 거세게 반발해온 북한으로서는 이번에 미국으로부터 주권 존중이라는 확약을 받은 것이다.
미국의 주권 존중 의사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라이스 장관이 올 3월 방한 때 북한을 의식해 내놓은 수사가 ‘북한은 주권국가’이었을 뿐이다. 당시 존중이라는 표현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미국은 주권존중과 평화공존을 공약함으로써 미국이 북한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북한의 우려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미국은 또 “북핵 문제는 6자의 현안이기에 북미관계에서 많을 것을 약속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으나 이번에 관계정상화 분야에서도 한발 물러섰다.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취한다”는 문구는 북한의 합의 이행에 따라 관계정상화 수위를 높여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관계정상화를 위한 북미간 양자협의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북한의 안전보장에 대해 상당히 파격적인 입장을 밝혔다는 점도 주목된다.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북한이 미국을 핵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대북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제네바 합의 당시의 안전보장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다.
재래식 무기를 통한 대북 공격 가능성 마저 차단한 것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결국 미국의 핵 선제 공격 전략의 최우선 타깃이 자신들이라고 주장해온 북한에게 이번 합의는 상당한 안보 울타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북미간 화해 흐름이 당장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은 6자간 합의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각국이 바로 실천하자는 방안을 제시했고, 관련국들이 이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북일관계 정상화도 북미간 진도와 맞물릴 것으로 보인다
■ 한반도 평화체제
9·19 합의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번 공동성명은 한반도 직접 관련 당사자들이 적절한 별도 포럼을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 조치가 진행되면서 1953년의 정전협정도 평화협정으로 대체돼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합의내용엔 북핵 타결을 계기로 전쟁 없는 한반도와 동북아를 만들자는 남북한과 관련국들의 여망이 담겨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향후 6자 회담은 공동성명의 분야별 과제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포럼 구성 문제 등으로 논의의 초점이 나뉘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 문제는 6자가 논의하는 방식으로는 진행되지는 않는다. 공동성명이 직접 당사국들만 포럼에 참여한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당사자 해결 원칙’을 견지하는 한국 정부는 정전협정의 대체 문제 등에 일본과 러시아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고 보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의 역할이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포럼은 한반도 문제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국 등을 중심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 합의는 남북 대화의 최우선 의제로 부상해 민족의 힘으로 영구적 평화체제의 수립을 이뤄야 한다는 당위성을 높일 것이다. 16일 끝난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문제가 논의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향후 남북한과 미국, 중국에서는 평화협정의 내용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남북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중이 보증하는 방식이 정부 안팎에서 논의되고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영구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거대담론은 북핵 폐기가 완료된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핵 폐기에 역점을 두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베이징=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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