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신년 맞이 때 나는 ‘사해불퇴주(史海不退舟)’란 글귀를 떠올렸다. 사료(史料)의 바다에서 물러나지 않는 배, 물러나지 않을 배란 뜻으로 지금의 나, 앞으로도 변치 않을 나를 담아보았다.
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지 어언 44년이 되었으니 이런 문구로 자신을 표현해도 망령되다는 소리는 듣지 않으리라. 역사학도에게 사료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은 숨쉬기와 같다.
그 유영을 통해 얻은 새로운 지식으로 새로운 설명 체계를 세우는 것이 역사 공부하는 재미다. 이 재미로 나는 40여년간 한국사학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동해 바닷가의 작은 반농반어촌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중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는 계단식 코스를 밟는 통에, 단계마다 촌티 벗기에 급급해 역사학자가 되겠다는 꿈같은 것은 가질 처지가 못 되었다.
꿈이라고는 초등학생 때 화가가 되겠다고 공부하라면 그림만 그리던 기억 밖에 없다. 역사학자가 된 내 인생은 고 3 담임선생님이 만들어 주었다. 서울대 정외과를 나오신 그 분은 우리들의 ‘영웅’이었는데 당신께서 다시 공부한다면 사학을 하겠다는 말로 내게 사학과를 강권하셨다. 나는 촌놈이 되어 정치학과나 법과를 갈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권유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는 대학이 이런 곳이구나를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학점과 관계없이 몰래 듣는 ‘도강’은 시험 부담이 없어 애용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나도 면무식하기(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꽤 많이 이용했다. 내가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전적으로 이 동숭동 캠퍼스가 풍기는 매력 때문이었다.
라일락이 화려하게 피는 교정, 어둡지만 서향이 가득한 학과 합동연구실, 국가와 사회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나눈 급우들과의 패기찬 고담준론 등이 나를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내 성미는 새 것 찾기를 좋아해서 남이 한 얘기를 따르거나 흉내 내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나의 한국사 연구 40여년은 통념, 통설을 깨는 작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역사학에 입문한 1960년대에는 일제 식민주의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역사상이 우리에게 전해져 있었다. 나는 식민사관 극복이란 차원에서 많은 것을 의심하면서 새로운 설명체계를 구하는 대열에 섰다.
1980년대 어느 해 정초에 대만에서 날아온 연하장에 후즈(胡適)의 이런 경구가 적혀 있었다. “사람을 대함에는 의심이 가는 것이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학문 함에서는 의심이 없어 보여도 의심을 가지라.” 반가운 마음으로 이를 오랫동안 책상앞 서가에 붙여두었다.
학부 졸업논문부터 통설을 깨는 작업이었다. 조선 초기에 첩자식(서얼)에 대한 차별이 왜 생겼는가를 다루는 글에서 당시 저명한 대가가 내 놓은 설을 비판했다.
그 분은 한 관료의 제안에서 비롯했다고 했고, 나는 당시 첩이 대부분 비첩(婢妾)이어서 그 천시관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공격의 대상은 덩치가 큰 것으로 골랐다.
유교망국설에 대해 도전장을 냈다. 조선왕조는 유교 때문에 망했다는 통설을 의심했던 것이다. 일제가 저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 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낸 것에 불과할 것이란 가정 아래 조선시대 유교가 순기능을 한 것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저들의 설을 묵수하면 우리의 500년의 역사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 연구에는 사상적인 것보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테마가 더 많았다. 유교도 현실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의도였다.
그 결과로 조선시대 유교사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즉 건국 초기에 정부와 지식인들이 민생 개선을 위해 농업기술과 의술의 개발에 진력하는 한편, 조세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무려 18만 명에 달하는 관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까지 한 정치가 확인되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의식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형태로 일종의 정당정치인 붕당정치가 발달한 때도 있었고, 그 붕당정치가 한계에 도달한 시점(18세기)에는 탕평군주들이 소민(小民) 보호를 외치면서 민을 왕과 함께 국가의 주체로 인식하는 민국(民國) 이념이 등장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조선시대 유교의 순기능 확인에 몰입했다.
탕평군주 정조의 민국이념에 대한 탐구 속에 외규장각도서 반환 요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88년에 내게 규장각도서 관리 책임직이 맡겨졌을 때, 나는 규장각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가부터 자문했다.
주위에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었다. 조금 조사해 보니 창덕궁의 비경인 부용정과 주합루 일대가 곧 본관 자리란 것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나는 이때 규장각과 규장각도서의 중요성을 여기저기 알릴 목적으로 ‘규장각소사(奎章閣小史)’란 책자를 준비했다.
그때 강화도에 설치된 외규장각 관련 자료를 찾다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로즈 제독이 본국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외규장각에 수장된 근 5,000 책 가운데 350점만 반출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퇴각한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방화까지 저지르다니. 국제법학자도 가만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프랑스정부에 대한 외규장각도서 반환 요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92년 임기를 몇 달 앞두고 같은 규장각도서에서 순종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대여섯 개의 서로 다른 필체로 위조된 사실을 발견했다. 위조 서명으로 결제가 된 60여종의 공문서들은 통감부가 대한제국의 정부를 통감부 아래로 넣는 데 관련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통감부 직원들이 황제 몰래 진행시켰던 것이다.
나의 의심의 벽(癖)이 활활 타올랐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강요된 을사조약을 비롯한 국권 피탈 관련 5개 조약의 원문들을 모두 꺼내봤다. 예상대로 엉터리가 발견되었다.
을사조약문에는 조약의 명칭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었고, 한국병합 관련 문서에는 비준서에 해당하는, 병합을 알리는 황제의 공포 조칙에 이름자 서명이 빠져 있었다. 황제가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나는 규장각에서 내 연구실로 돌아온 뒤 이런 결함, 결격들이 생기게 된 경위를 밝히기 위해 수년간 일본측의 관련 외교문서들과 씨름했다. 그 결과로 한국병합은 무효일뿐만 아니라 문서요건상 성립조차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두 가지는 나의 학문적 의심의 항해가 건져올린 대어들이었다. 두 건은 모두 상대국의 기피로 아직 미제로 남아 있지만 국제적 불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킨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다.
나의 항해는 지금 우주로 향하고 있다. 조선시대 유교의 순기능을 확인하려는 나에게는 조선중기 역사의 허술, 허약한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왜란, 호란의 외침에서 관군이 쉽게 무너지고, 국왕이 적장 앞에 무릎을 꿇고,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이 시대의 역사상은 변명할 길이 없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17세기 위기론이 서구역사학자들의 담론으로 국내 학계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폭동 전란 반란 기아 등은 태양 흑점활동의 쇠퇴로 지구의 기온이 내려간 것이 원인이라는 신학설이었다.
나는 즉각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시기 부분부터 펼쳐 보았다. 천재지변에 관한 한 우리 실록을 따를 기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록에는 우박, 서리, 때아닌 눈 등 기온 강하와 관련된 기록은 숱하게 나오나 흑점활동 관련 기록은 별로 없었다. 대신에 유성(운석)이 수없이 나타나거나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체물리학 전공 교수의 도움으로 우주과학계의 신학설인 외계충격설(6,500만년전 공룡소멸원인설)에 접했고, 이를 통해 역사시대에도 우주현상의 하나로 수십년간, 일이백년간 장기적으로 운석 떼가 지구대기권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내 연구와 시기를 같이하여 런던에 본부를 둔 ‘학문간연구회’(Society for the Interdeciplinary Studies)가 충적세후기(3,500~500BC)에 외계충격이 장기화한 사실과 함께, 운석 폭발시의 놀라운 광경에 대한 공포심으로 신이 처음 등장하고 신에 대한 제사가 성행하는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그들은 위에서 나는 아래서 같은 문제를 다루었다.
실록의 관련기록들을 분석해보니 운석 돌입에 따른 연관현상의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근거로 통일신라기, 고려중기, 고려말~조선초 등의 시기에도 장기적인 외계충격이 발생한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기간들이 전 세계적인 동요기란 사실 앞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조선 중기의 매관매직은 비리가 아니라 끝없이 발생하는 기근 앞에 정부가 사곡(私穀) 동원을 위해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라는 것도 드러났다.
관에서 발행하는 납속공명첩(納粟空名帖)의 경우는 그랬다. 조선중기의 허약한 역사에 대한 변명을 넘어 우주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한국사 서술이 눈앞에 다가와 희열 같은 것이 엄습한다. 문학(問學)의 의심이 우주를 나의 사해(史海)로 끌어 들이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데도 왜 공부를 하지 않겠는가.
● 이태진 교수는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사료를 통해 잘못된 역사기록은 물론 외교관계까지 바로잡는 역할을 해내는 한국사학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1988년부터 92년까지 규장각 관리실장을 맡는 동안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훔쳐간 전말을 상세히 밝혀내 외규장각도서 반환운동의 불을 붙였으며 일제강점의 근거가 된 여러 조약이 위조문서에 의한 불법행위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또 대한제국이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세제와 농업 의료 같은 산업측면의 사료로 밝혀내 식민지근대화론을 이론적으로 반박했다.
1943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학과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77년부터 서顚肉【?가르치고 있다. 2003년에는 미 하버드대에서, 2004년에는 일본 도쿄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했다.
현재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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