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추석 귀성열차는 콩나물 시루였다. 객차 안은 앉거나 서거나 별반 차이가 없었고, 땀냄새와 술 냄새로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피난민 열차처럼 난간에 매달려 가기도 하고, 짐 얹는 선반 위까지 사람들이 올라가 앉았다. 서울역 넓은 광장에는 쪼그려 앉은 채 기차를 기다리는 귀성인파로 가득했다.
다리에 쥐가 나 잠시 허리를 곧추세우려 하면 경찰들은 기다란 장대를 휘둘러댔다. “사람 살려” “아이쿠” 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쏟아졌고. 그래도 고향을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냥 밝고 즐거웠다.
▦‘눈 위에 주름 귀 밑에 물사마귀/다들 한결같이 낯설지가 않다/아저씨 워데까지 가신대유/한강만 넘으면 초면끼리 주고받는/맥주보다 달빛에 먼저 취한다/그 저수지에서 불거지 참 많이 잡혔지유/찻간에 가득한 고향의 풀냄새/달빛에서는 귀뚜라미 울음도 들린다/…/이 하루의 행복을 위해/흘린 땀과 눈물도 적지 않으리/…’ (귀성열차, 신경림) 75년에는 서울 용산역 계단에서 추석 귀성객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져 4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사상자 대부분은 동생들 학비를 대고 병든 아버지의 약값을 벌겠다며 상경했던 여공과 가정부들이어서 심금을 울렸다.
▦귀성인파가 100만 명을 넘어서 ‘민족대이동’이란 말이 생긴 건 80년대 들어서다. 절정에 달한 탈농과 도시화라는 사회적 현상에 마이카 열풍과 고속도로 확충이 고향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다.
‘귀성전쟁’이니 ‘거북운행’이니 하는 말이 나온 것도 이때인 듯 싶다. 90년대 오면서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한 부모들이 상경하는 ‘역귀성’이 등장했다. 개인주의 확산과 서울토박이가 늘어나면서 귀성객이 줄어든 대신 관광지가 북적대는 것도 새로운 한가위 풍경이다.
▦이번 추석에는 귀성을 포기하는 사람이 유례없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 더욱 얇아진 주머니 사정과 짧은 연휴 등이 주된 이유지만 100만 명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자들은 고향은커녕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부모 볼 낯이 없는 이들에게 한가위 연휴는 고통스러운 시간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명절을 명절답게 보내지 못하는 이웃이 너무나 많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년 중 가장 크고 밝은 달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향을 찾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 모두 달을 보며 소원 한가지씩 빌어보길.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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