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창설 60주년을 겸해 14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정상회의가 개막 당일부터 회의 무용론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191개 유엔 회원국들의 정상들이 대거 참석해 지구촌 최대 규모로 치러지는 외양과는 대조적으로 이 자리에서 논의되는 안건들이 지극히 형식적이란 데서 나온 비판이다.
회원국 정상들은 사흘간 계속되는 회의에서 빈곤 테러 인권 군축 등 세계가 직면한 도전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관료주의로 비난 받는 유엔을 개혁할 방향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정상회의의 안건이랄 수 있는, 앞서 13일 채택된 유엔 총회 선언문은 이런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강대국 간, 선진국과 후진국 간, 서방과 이슬람권 간 첨예한 이해다툼으로 인해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 선언문은 무엇을 선언하는 지 조차 헷갈릴 정도로 누더기 종이쪽지로 전락했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주어진 것을 가지고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면서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고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날 총회가 우여곡절끝에 마련한 35쪽짜리 선언문은 빈곤퇴치와 평화구축위원회 및 인권위원회 신설, 무역장벽 완화, 반 테러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테러리즘인지, 인권위원회 구성에 어떤 기준을 적용할 것인지, 빈국 지원을 위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 지 등의 각론은 명시되지 않았다.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문구가 적당히 수정되고 미묘한 사항은 추상적인 말로 물타기 한 탓이다.
일례로 선언문은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한다’고 했으나 민간인을 살상하는 행위나 외국의 점령에 대한 저항권 등을 테러 범주에 넣을 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핵 비확산(nonproliferation)과 군축(disarmament)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비확산만 주장하는 미국과, 군축도 병행돼야 한다는 핵 비보유국 간의 간극이 타협할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아난 총장은 “두 단어가 사라진 것은 큰 실망”이라며 “누가 이 실망을 가져왔는 지 밝히지는 않겠지만 이는 치욕”이라고 비판했다. 유엔개혁의 핵심인 안보리 확대문제도 예견된 데로 일찌감치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나마 성과라면 민간인이 전쟁범죄나 인종학살의 희생자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 경우 유엔이 개입할 수 있도록 평화구축위원회(peace_building commission)를 신설키로 한 것과 선진국들이 국내총생산(GDP)의 0.7%를 개발원조로 제공한다는 데 합의한 것 정도다. 그러나 개발원조도 미국의 반대로 구속력을 부여하는 데 실패해 선진국의 자발성에 기대야 할 형편이다.
비정부기구(NGO)들은 “선언문이 외교관들의 무능력과 무소신을 드러냈다”며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이들은 쿠바 파키스탄 이집트 이란 시리아 미국 베네수엘라 등 7개국을 분열을 일으키는 문제 국가로 거명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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