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김수영(金秀映)의 ‘오랜 밤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문학의 질료라는 것이 흔히 아스라한 기억의 곳집 속에 쟁여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평범한 사실을 새삼 실감케 하는 또 다른 뛰어난 시집이 정화진(46)의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이하 ‘장마는 아이들을’: 1990년)다. 10년 간격으로 나온 이 두 시집은 닮은 데가 많다.
시집의 주된 제재를 화자의 유년기에서 끌어냈다는 점도 그렇고, 그 유년의 기억 속에 물 이미지가 출렁인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먼저 나온 ‘장마는 아이들을’의 공간은, 뒤에 나온 ‘오랜 밤 이야기’의 공간과 달리, 과거와 현재가 포개진 공간이다. 이 시집의 많은 시들에서, 어른이 된 화자는 그가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화자와 나란하다. 그 어른 화자는 “하얗게 바랜/ 잘 그려지지 않는/ 시간을 만져보”(‘색연필’)며 제 유년의 뒤란을 단아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단아하게! 정화진의 언어는 단아하다. 그의 고향이라는 경북 상주와 그 둘레지역에 대해 한국인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귀족적 기품’의 이미지를 그의 언어는 넉넉히 감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단아한 ‘사대부 규수’의 언어로 빚어진 ‘장마는 아이들을’의 속 빛깔은 ‘오랜 밤 이야기’에 견주어 한결 더 현란하다.
다시 말해 원색적이다. 이런 뜻밖의 사태는 정화진의 (회상 속) 화자가, 김수영의 화자와 달리, 아프다는 데서 빚어진 것 같다. ‘징거미 더듬이’라는 작품에는 폐렴을 앓는 아이가 나오고, ‘칼이 확대된다’에는 말라리아를 앓는 아이가 나온다. 아마 시인의 유년기 모습일 이 아이들의 병에 크게 기대어, ‘장마는 아이들을’은 ‘원색의 미학’이라 부를 만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원색의 세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샤머니즘이다. 전통사회의 사대부들에게 비천함의 표지로 간주됐던 무속은, 더 나아가 원색 이미지들은, 정화진 언어의 귀족적 단아함과 기이하게 접속되며 ‘장마는 아이들을’의 아름다움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한다.
생명의 표지로서 숨(결)에 대한 조바심은 김수영의 어린 화자들에게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화진 화자들의 회상 속에서 더욱 강렬하다. 그 회상 속의 ‘단발머리 아이’가 아프기 때문이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마당은 싫어......”라거나 “숨, 막, 혀, 할머니,”(‘자주빛 하늘’), “연기가 부엌을 넘쳐나와 건넌방 쪽으로 몰려간다/ 아이는 목이 막힌다 금이 가고 있는 단지 속에 먼지가 쌓인다”(‘녹슨 부엌’), “내 허파는 서서히 불어났다 내 숨소리는 붉은 고추장 빛이었다”(‘누치’) 같은 시행들에서 숨쉼에 대한 화자의 강박이 파들거린다. 단발머리 아이의 병은 또 ‘장마는 아이들을’의 공간을 칼과 피의 이미지로 버무린다.
‘근암댁’이라 불리는 (화자의) 할머니가 휘두르는 그 칼은 손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축생의 산멱통을 겨눈다. 그 칼에는, 그 칼을 쥔 할머니의 손에는 “입술을 열고 붓던 자라의 피와 가느다란 영혼 하나”(‘징거미 더듬이’)가 묻어있다.
‘장마는 아이들을’에서 칼은, 이 시집의 해설자 하재봉도 지적했듯, 병을 치료하기 위한 주술의 도구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바가지에 담긴 정갈한 물에 칼을 씻는다/ 칼 씻은 물을 마시던 아이가 이제는 싱크대 뒤켠의 칼을 본다/ 칼이 확대된다....../ 말라리아가 파먹은 더위를 칼물로 잠재운다/ 칼의 작은 입자들이 아이의 가슴에 점점이 박히고 아이는/ 말라리아를 칼물과 함께 뱉아 버린다”(‘칼이 확대된다’). 아이가 마시는 것은 칼이고, 그 칼이 병을 제어한다. “할머니가 아이를 위해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난 후/ 마당 한가운데 땅을 긁어 십자표를 긋는다 노란 흙이 날린다/ 맞물린 십자표식 위에 정확하게 칼을 꽂아 바가지를 덮어씌우는 할머니/ 말라리아의 가슴을 찍어 가르려 한다(‘칼이 확대된다’).
‘장마는 아이들을’의 무속적 상상력은 첫 시 ’춤’에서부터 일찌감치 작동하고 있다. “수억의 구더기 떼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알할랄랄라이/ 랄랄랄하이하이/ 알할랄랄라이”(‘춤’ 전문). 둘째 행 이하의 의성어에서 무당의 굿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숨막힘, 칼과 피, 이것들이 빚어내는 무속 공간이 ‘장마는 아이들을’의 원색성을 강화한다. 이 시집에 되풀이 나오는 맨드라미도 그렇다. 닭볏 모양의 이 꽃은 흔히 핏빛이고, 그래선지 동물 이미지가 짙다. 맨드라미는 주술의 원색성에 걸맞은 꽃이다. “돋는 푸른 잎 위에/ 막, 잘라 얹어 놓은 개 대가리/ 붉은 그늘 번득이는”(‘맨드라미’).
‘장마는 아이들을’에서 칼과 빛은 흔히 동위(同位)에 서 있다.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칼의 잔광이 어둠에 싸인 마당을 자른다”(‘남쪽 마당’)에서 칼과 한몸이 된 빛은 “홑이불 속을 파고 들어가는 달빛”(‘푸른 모기장’)이라거나 “아홉 마리 눈뜨지 않은 쥐들은 햇빛에 찔려 마당에서 죽었다”(‘붉은 쥐’) 같은 시행들에서도 베거나 찌르는 구실을 한다 이 원색의 공간 안에서 서정적 자아의 과거는 외롭다. 그 아이의 둘레를 지키는 사람은 “아득히 돌다리 위를 흐르는 할머니”(‘흐르는 할머니’)와 “짚단 썩는 내음 같은 것으로/ 피어오르는 할아비”(‘피어오르는 할아비’) 뿐이다.
할아버지를 향한 추억에서도 그렇지만, ‘장마는 아이들을’의 화자가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흔히 후각을 통해서다. “매캐한 내음이 방안으로 쓸려온다/ 재나 쓴 씀바귀 같은 길이/ 구두주걱 바깥에 놓여 있다 검은 내음이 풀풀/ 날려와 창틀 안쪽에 흩어진다”(‘겹유리창에 구두주걱이’)라거나, “흙들만 서로 엉겨서 부푸는 쉰내나는 속으로/ 떨어지는 먼지 내음만 드문드문/ 없는 속이다”(‘잠’), 또 “장마는 우리 꿈에 알을 슬어놓고/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향기로운 날개를 달게 하고”(‘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라거나, “대청 마루 아래서 피어오르는 썩은 감자 내음이 마당귀에 괴이다가/ 토담 밖으로 날리어 간다”(‘자주빛 하늘’) 같은 시행들이 그 예다.
‘장마는 아이들을’에 되풀이되는 ‘고요함’과 ‘조용함’에도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새벽 3시 10분,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물을 찾다가 본다// 고요하다, 어둠 속엔 석류알 같은 소리들이 박혀 있다”, “시계가 3시 15분을 가리킨다 고요하다/ 서서히, 어둠 속에 박힌 소리들이 한 알씩 빠지기 시작한다”(이상 ‘칼이 확대된다’), “국자 속에 담긴 자라의 피에 묻은/ 자운영 향기가 모깃불 연기와 섞이고 있는 고요한 마당”(‘남쪽 마당’), “물 속, 부드러운 모래밭 위로 꼬불꼬불 나 있는/ 몇 개의 가느다란 길/ 지금은 고요한 물 속. 투명하게 열려 있는”(‘감추어진 길’), “마당이 고요하다/ 뱀풀도 참비름꽃도 없는/ 서쪽 담 아래 돌 위엔 정한수 담던 사발이 버썩 마른 채 여전히/ 놓여 있다”(‘납비녀’), “나는 징거미 더듬이가 가득 묻어 있는 현관문에 귀를 바짝 들이댄다/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조용하다”(‘징거미 더듬이’) 같은 시행들에서 거듭되는 고요함, 조용함은 화자의 현재와 과거를 잇는 회랑이고, 실제와 헛것을 매개하는 통로다.
놀이를 위해 멍석을 깔듯, 정화진은 시간 여행을 위해 미리 고요함을 깔아놓는다. 고요한 현재, 움직임 없는 그 현재 속으로라야 과거가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고요함은 정화진에게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장마는 아이들을’의 공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경계가 흐릿하다.
과거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가(시인은 화자의 과거를 고집스럽게 현재형으로 기술한다!), 귀신처럼 홀연히 되살아나 화자의 현재와 한데 섞인다. 고요는 과거를 불러내고, 느닷없이 나타난 그 과거가 현재와 한바탕 뒤섞여 노닐다 간 뒤 다시 고요가 남는다. 서정적 자아의 과거는 유년기를 훌쩍 넘어, 예컨대 ‘흰 나비떼’나 ‘누치’ 같은 작품에서처럼, 아득한 태고를 향하기도 한다. ‘퇴침’이나 ‘섭씨 8,900도 가량’, ‘백통가락지’ 같은 작품에서도 화자의 호고(好古) 취향이 엿보인다.
‘장마는 아이들을’의 언어는 맑은 물에 정성껏 빨아 햇볕에 말린 뒤 빳빳이 다듬이질한 모시적삼 같은 언어다. 아니다, 그 언어는 살얼음 둥둥 떠있는 동치미국 같은 언어다. 아니다, 그 언어는 귀기 서린 홀림의 언어다. 그 언어가 치밀하면서도 대범한 것은 그 언어를 부린 시인이 예민하면서도 듬쑥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 시인은 향반 출신의 규방문학가 같기도 하고, 지혜와 총기로 그득 찬 무녀 같기도 하다.
객원논설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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