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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0) 단순한 그림 속의 극명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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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0) 단순한 그림 속의 극명한 세상

입력
2005.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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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무릇 언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장르로 알려져 있다.

이건 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관념에 속하는 것일 텐데, 모든 관념이 그러하듯 이런 생각은 종종 시와 관련된 다양한 의견과 가능성들을 미리부터 차단하는 족쇄로 여겨지기도 한다.

말을 바꾸면, 시는 과연 아름다워야 할까, 또는 언어로서 형성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을 새삼 가져 보는 것이 시의 의의와 가치를 새롭게 매김 해보는 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럴 경우, 우선 따져 봐야 할 것은 시에 있어 언어의 역할과 기능일 것이다. 전세계 문학사를 다 따져 봤을 때 자기 나름의 언어론을 피력한 수 많은 시인들이 있을 테지만, 지금 언급하는 시인은 그 중 가장 과격하고 독창적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출신의 시인 롤프 디터 브링크만(1940~1975)의 시 중 일부이다.

너희들은 그것을 언어/ 혹은 벽에 걸린 거울이라 칭한다/ 어디에 독일인의 조국이 있으며/ 어디에 툴레의 왕의/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가// …(중략)…// 돌아오려는 자가 아무도 없다면/ 그러면 너희들은 그것을 언어/ 벽의 거울이라 칭한다/ 온 나라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지 (‘너희들은 그것을 언어 벽에 걸린 거울이라 칭한다’ 에서)

이 시에서 ‘너희들’은 브링크만의 동세대이거나 그 이전의 독일 시인들 전부를 지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너희들’은 ‘언어’를 ‘벽에 걸린 거울’이라 칭하는데, 그 ‘거울’은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못된 왕비의 요술 거울과도 같다. 요컨대 절대적으로 신성화한 언어의 거울 앞에서 ‘너희들’은 오로지 자신만의 신비로 치장된 내면의 감옥 안에서 임의로 특권화한 주관적 불가지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신랄한 브링크만의 비판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문학의 새로운 정통으로 등극한 고트프리트 벤을 필두로 소위 ‘밀폐시’라는 이름으로 독일시의 암울한 전통을 이어간 파울 첼란이나 잉게보르크 바하만 등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을 선민화하는 귀족적 문학 전통을 향해 내던져진 한 방만하고 불량한 청년의 거침없는 독설로 받아들여졌다. 브링크만은 무엇보다 시에서 언어의 가식적인 기름기를 빼는 데 주력했다. 그에게 언어란 현실을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브링크만의 시는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이나 정경 등을 자신이 본 그대로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한 시집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우리가 보고, 종사하는 것들은 정확하게 보고 아주 그대로 재현된다.’ 이 말처럼 그의 시는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에 투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눈을 통해 포착된 풍경에 대한 적나라한 관찰과 정확한 재현에만 전념한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고밀도로 인화된 사진이나 별 스토리 없이 변화하는 정경들만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영화를 연상케 한다.

그는 말을 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터져 나오려는 말과 감정들을 탈거시키기 위해 언어를 이용한다. 풍경의 일부분을 떼어내 재조립하는 망치나 톱처럼 언어를 부리는 그의 시는 매우 건조하지만, 일견 평범하고 낯익은 풍경을 재현해낸 그의 풍경엔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비밀스런 공명감이 있다.

한 처녀/ 검정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가/ 양말 올 하나 풀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녀의 그림자/ 거리 위에/ 그녀의 그림자/ 담가에./ 그녀가/ 치마/ 밑에까지/ 올 하나 풀리지 않은/ 검정색/ 스타킹을/ 신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 (‘단순한 그림’ 전문)

이 시의 내용은 검정색 스타킹을 신은 처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묘사한 게 전부다. 일말의 감정 개입이 있다면 전반부와 후반부에 한 번씩 반복되는 ‘아름답다’란 말뿐이다. 제목마따나 ‘단순한’ 풍경에 대한 ‘단순한’ 인상이 전부인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 보면 그게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단어와 문장들을 토막 내듯 한 연으로 길게 늘여 쓴 이 시는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뉜다. 처녀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에 대한 첫 번째 묘사가 한 토막, 거리와 담가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한 토막, 그리고 처녀가 걸어오는 모습에 대한 두 번째 묘사가 또 한 토막이다. 이건 마치 하나의 사물을 세 개의 각도에서 각각 촬영한 연속 사진처럼 보이고, 작용한다.

브링크만은 이렇듯 ‘단순한 그림’의 묘사를 통해 시인의 관념이나 정서를 일방향으로 토로하는 게 아닌, 독자 스스로 시의 풍경 속으로 들어와 풍경을 재해석하게끔 하는 것을 시적 방법론이자 이상으로 삼았다.

그건 언어의 비대한 팽창과 독단적 구술을 제어함으로써 언어가 지각하지 못하는 일상의 섬세한 이면과 정서를 독자 스스로 발견하게 만드는 일종의 놀이과도 같다. 브링크만에게 시는, 그리고 언어는, 항상 새로운 정경과 대상들을 만들어내는 레고 블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놀이는 그저 그런 ㈗岾?차원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위선과 가식을 발가벗겨 매 순간의 삶을 신천지로 바꾸려는 농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서양의 정신사를 종횡으로 파헤쳐낸 유구한 철학적 전통과 웅장한 예술적 바탕을 가진 독일에서 브링크만의 시는 상당히 이색적이고 파격적인 일탈로 여겨진다.

실제로 브링크만이 영향 받은 문화는 동시대 미국에서 만개한 팝 아트와 비트 등의 반문화였다. 거기에 일상 세계를 뒤집어 세계의 잠재된 모습을 그려내려 했던 초현실주의와 다다의 방법론이 그의 잠재 의식 속에 있었다.

그 당시 서양 젊은이들이 으레 그랬듯 브링크만 역시 록 음악과 영화, 사진, 잡지와 광고 등의 저급 문화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 모든 비(非)시적인 모티프를 직접 시에 인용하거나 그대로 모방했다.

그건 실제 삶의 영역에서 발현된 모든 문화적 양식들을 시에 수렴함으로써 시가 생활의 한가운데에서 자연 발화하는 가장 온기 있고 실천적인 예술의 한 극단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일이었다. 더불어 그건 삶이 고상하지 않은데, 어찌 시가 마냥 고상할 수 있겠냐고 항변하는 한 불행하고 가난했던 시인의 처절한 외침처럼 들리기도 한다.

전적으로 유사한 건 아니지만, 브링크만이 추구했던 소위 일상시나 언어 해체의 시적 방법론은 1980년대 우리 문단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일상의 전면적 노출과 구문 파괴 및 비틀기와 혼성 모방 기법 등이 몇몇 혁신적인 시인들의 실험으로 유행하다시피 했었는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불현듯 종결된 이른바 ‘시의 시대’의 끝물에서 한국의 해체시는 자멸하듯 사라져갔다.

그게 시인들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 시를 수용하는 독자들의 변심 탓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시에 대한 문단 안팎의 전면적인 무관심과 무지의 소산인지 정확히 짚을 순 없지만, 지금 한국에서 시는 천민의 문화도 귀족의 문화도 아닌, 브링크만 식으로 얘기하자면, ‘너희들’만의 거울놀이 같은 게 되어버렸다.

그 ‘너희들’의 언어는 ‘벽에 걸린 거울’ 역할에 자족하면서 스스로의 예민한 돌기를 거울 속에 파묻어 버린 셈이다. 그렇게 쓰여진 시들은 자칫 ‘거울 속의 계관’에 머물거나,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시인들만의 호사 취향에 그치게 된다.

거울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가장 솔직하지 않은 상태로 이끈다. 거울을 반성의 비유로 자주 쓰곤 하지만, 사실 거울을 보면서 가능한 건 반성이 아니라 변명이나 치장에 가깝다. 거울 속에 반영된 자아는 자위와 자존을 위해 은밀한 골방 속에 세계와 자아와 관련된 명명백백한 진실들을 은폐한다. 거울은 스스로에게 결락된 부분을 채우거나 감추는 방식으로 더 많은 가장과 가식의 언어를 팽창시킨다.

때문에 거울의 언어는 꾸며진 안정성과 자기 만족의 동어 반복이나 다름 없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지, 라고 백날 물어 봐야 늘 돌아오는 대답은 거울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자가 미리 적시해 놓은, 세상의 그 누구도 들려주지 않으나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바로 그 대답뿐이다. 거울은 말한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그러나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나타나듯 거울이 진실을 말할 때, 세계가 위태로워진다. 살아 생전 독일 문학계의 시건방진 왕따로 통했던 브링크만은 거울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교감의 하모니가 짜여진 언어의 마술에 불과하다는 걸 폭로하면서 이 지긋지긋하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쓰레기 같은 세상의 풍경들을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짓찢겨진 사람들의 삶, 즉물적으로 환기되는 감각의 첨단을 인간적으로 회복하려 애썼다. 국내에 소개된 것이라곤 몇몇 시 전문지에 실렸던 짤막한 논문들과 유일한 번역시집 ‘빨랫줄 위의 비애’(이윤옥 옮김, 고려원)가 전부이지만, 브링크만의 외로운 노력은 새롭게 주목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벽에 걸린 거울’을 깨뜨려 세계의 벽에 온몸으로 부딪힌 시적 실천의 극명한 표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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