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적으로 수집된 증거인 도청테이프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독수독과(毒樹毒果) 논란을 피하면서 안기부 ‘X파일’의 삼성 정치자금 진위를 가려줄 단서가 속속 나와 검찰 수사가 새 국면을 맞았다.
우선 삼성이 1997년 대선 때 최소 60억원 이상의 불법 정치자금을 준 것으로 드러났던 ‘세풍(稅風)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삼성이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씨에게 최소 60억원을 준 사실을 밝혀냈으나, “국세청을 동원한 강제 모금이 아니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았다.
이 돈은 97년 대선 직전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의 대화를 녹음한 X파일에 나오는 정치자금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세풍 수사기록은 검찰에게 불법 증거를 수사에 사용했다는 시비를 피하는 훌륭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사안의 본질인 대선자금 제공은 같다.
하지만 추궁의 토대가 수사기록에 드러난 관련자 진술이냐, 아니면 도청테이프에 담긴 대화내용이냐에 따라 법적 판단과 결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난 6일 김인주 삼성 구조조정본부 사장을 불렀을 때도 검찰은 세풍 수사기록을 토대로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사장이 삼성 대선자금의 전달책 역할을 했다는 X파일 내용을 간접 확인해주는 단서도 새로 제기됐다. 일부 신문은 “98년 홍 사장이 대주주로 있던 보광그룹 탈세사건 수사과정에서 삼성이 한나라당에 주기로 한 대선자금 가운데 일부인 30억원을 홍 사장이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대검 중수1과장으로 수사를 맡았던 이승구 법무부 감찰관은 “탈세 수사에 전념하느라 돈의 출처나 용처에는 별로 신경쓰지 못했다”면서도 홍 사장의 30억 횡령 부분이 있었음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검찰이 참여연대 고발사건 처리 형식을 뛰어넘어 본격 수사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한변협 법제이사를 지낸 김갑배 변호사는 “도청테이프는 위법증거이기 때문에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없고 참여연대 고발만으로는 삼성에 대한 강제수사에 나서기 힘들었다”며 “최근 드러난 정황들은 검찰이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에 나설 수 있는 충분한 근거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삼성 대선자금의 출처가 불법 조성된 기업 비자금이라면 아직 공소시효(10년)가 남아 있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ㆍ배임죄에 해당한다.
물론 검찰이 독수독과론을 피해 본격 수사에 나서도 성과를 얻을 지는 미지수라는 시각도 여전하다. 8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라 당사자들의 자백 없이는 수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검찰도 “참여연대가 고발한 만큼 절차에 따라 처리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수사상황과 방향에 대해선 함구 중이다.
그러나 독수독과 시비를 차단해줄 ‘해독제’는 대선자금 수사도 요구하는 여론을 충족시키면서 나머지 도청테이프 내용 수사 여부와의 형평을 요구하는 삼성측 문제제기를 피해가는 비방(秘方)이 될 수 있다. 검찰이 의외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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