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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말의 힘, 그리고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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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말의 힘, 그리고 폐해

입력
2005.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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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31일 폭염의 바그다드 거리는 시아파의 성인 7대 이맘(영적 지도자) 무사 알 카딤을 기리는 순례자들로 넘쳤다. 이날 새벽 알 카딤 사원 단지 내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7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했지만 사원으로 향하는 순례자의 발길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티그리스 강을 가로지르는 아이마 다리 위도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다리를 이동하는 군중 속 누군가의 입에서 “이 속에 자살폭탄 테러범이 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 한 마디는 삽시간에 순례자들 사이로 퍼져나가면서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서로 다리를 벗어나기 위해 밀고 밀리면서 깔리거나 강으로 떨어져 900여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했다.

수개월 전 시아파와 수니파가 대치하면서 설치한 다리 중간의 바리케이드가 병목현상을 빚어 피해를 키웠지만 대참사의 불씨는 책임 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였다.

●8ㆍ31대책 이후 위압적 말 쏟아내

‘청소를 열심히 하는구나.’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참 좋구나.’ ‘많이 힘들었지?’ ‘선생님이 지난 시간에 심하게 화를 내서 미안하다. 잘 해보자.’ ‘이번 시간에 잘 들어주어 고맙다.’ ‘선생님 좀 도와서 책상 위 좀 정리해주지 않을래.’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시험 좀 못 봤다고 실망하지 마라.’ ‘실수할 수도 있지. 다음부터는 조심해라.’ ‘알았어. 그런 까닭이 있었구나.’

교사가 아이들에게 자주 해주어야 말들이다. 전교조의 학급경영 CD에 담긴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말’의 일부이다. 아이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용기와 힘을 주고, 인격체로서 인정해주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말들이다. 모두 아이의 미래, 국가의 미래를 위한 깊은 배려를 담고 있다.

8ㆍ31부동산대책을 내놓으면서 뱉어놓는 정부 관계자들의 말들이 하나같이 거칠고 위압적이다. 부동산대책을 내놓은 뒤 신도시 예정지인 송파지역에 투기바람이 불자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지금 부동산취득자에게는 상투를 잡는 계기가 된다”고 저주 섞인 말을 했고 김석동 재경부 차관보는 “송파 신도시의 부동산 투기꾼은 국세청이 평생 관리할 것”이라며 범죄자 다루듯 말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부동산투기와 관련해 탈루혐의가 드러나면 이 사실이 전산망에 입력돼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투기 움직임과 자금 흐름까지 추적대상에 포함된다”며 “투기 혐의자로 전산망에 오르면 사실상 평생 투기감시 대상이 된다”고 부연 설명했다.

●국민 배려 않는 발언에 아쉬움

이미 청와대에서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정책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대통령까지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부동산투기를 잡겠다”며 부동산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터라 어느 정도 강경발언에 대한 면역성이 길러져 있었지만 표현 강도가 나날이 더해가는 것을 보며 혹시 8ㆍ31대책의 약발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닐까 불길함을 느낀다.

대통령 스스로 국민이 자신의 뜻을 몰라준다며 “민심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고 하고 홍보수석이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있는데 국민은 독재시대 문화에 빠져있어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말하는 분위기에 정부 관리들이라고 국민을 귀히 여기고 배려할 까닭이 있겠는가 싶기는 하다.

이럴 때일수록 말의 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말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운명을 바꾼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그 말씀은 곧 하느님이니라”는 성경 구절은 말의 위대한 창조력을 암시한다. 세상을 지배한 사람은 말을 지배한 사람들이었다. 공자도 “말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말이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말이라는 뜻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소련 전차처럼 쳐들어갔다가 프랑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오겠다”는 등의 명언을 남긴 무하마드 알리는 “나의 승리의 반은 주먹이었고 반은 말에 있었다”고 했다.

국가와 국민의 삶을 책임진 지도자들이야말로 말 한 마디의 막중한 힘과 함부로 내뱉은 말이 초래하는 헤아릴 수 없는 폐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을 배려하지 않은 말이라면 한 마디라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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