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정서보다 국제조약이 우선"
대법원이 9일 전북도의회가 제정한 학교급식 조례를 무효라고 판단한 것은 우리 농산물에 대한 범국민적 선호 정서보다는 법리적 판단을 중시한 결과다. 국가 대 국가로 맺은 국제조약은 국내 법령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므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가 국제 조약의 취지에 어긋난다면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세계무역기구(WTO)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규정에 따르면 수입물품의 국내 판매에 불리한 영향을 주는 법률, 규칙 및 요건 등이 국내 생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적용돼서는 안 된다”고 해석했다.
또 “수입국이 법률, 규칙 및 요건에 의해 수입물품에 대해 국내의 동종 물품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차별적인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그런데 전북도의회의 조례는 전북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우수농산물로 규정해 이를 학교급식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이런 우수농산물을 사용하는 학교에 식재료나 그 구입비를 지원하도록 하고 있어 수입물품과 국산품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에 따라 다른 쟁점까지 검토할 필요 없이 이 조례는 무효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이날 무효 판정으로 같은 소송이 계류 중인 서울시와 경기ㆍ충북ㆍ경남도의 학교급식 조례 역시 무효로 결론 날 것으로 보인다.
우리농산물 사용을 강조한 조례가 무효라고 해서 당장 내일부터 학생들의 급식에서 우리농산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교급식의 식재료 결정은 학교의 권한이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국산을 절대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 만큼 당분간 학교들은 우리농산물을 계속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학교직영이 아닌 외부민간업체에 급식을 위탁하는 학교의 경우 영리를 앞세운 위탁업체들이 본격적으로 값싼 수입농산물의 비중을 늘릴 가능성이 크다. 현재 전체 학교의 83%가 직영급식을, 17%가 위탁급식을 하고 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은 우리농산물을 사용하도록 강제해 왔던 근거가 사라지고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됨에 따라 직영학교에서도 점차 수입농산물 비중을 높이는 ‘시장논리’가 고개를 들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말 현재 연간 급식경비 부담액 2조9,052억원 중 학부모 부담액(2조3,075억원)이 79.4%를 차지하고 있어 급식의 질은 학부모의 호주머니 사정에 크게 좌우될 수 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의 대표 발의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학교급식법 개정안 처리도 영향을 받게 됐다. 개정안의 주요 골자가 ‘학교급식에 우리농산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대법원의 이날 판결로 조약의 효력이 거듭 확인됨에 따라 조약과 법률의 충돌을 둘러싼 위헌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시민단체 "학생 건강 지켜야"/ 외교부 "통상마찰 번질 수도"
서울, 경기, 전북 등 7곳의 광역단체는 2003년말부터 시민단체들과 함께 국산농산물 사용을 의무화하는 조례를 제정하거나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국제무역기구(WTO) 협정 위배로 인한 통상 마찰, 법체계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로 대법원에 제소하는 등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지자체들은 국산농산물 사용이야말로 학생들의 건강을 지키고 지역 농업경제를 살릴 수 있는 수단이라는 입장이다. 조례 제정에 앞장서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특히 학교급식에 위탁급식제도가 도입된 1996년 이후 업체들이 식재료나 위생설비에 투자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저가의 외국농산물을 사용하면서 학교급식재료의 위해성이 높아졌다고 주장한다..
학교급식법 개정과 조례 제정을 위한 국민운동본부의 박미진 상임위원장은 “국산농산물 사용 조례 제정운동은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생명운동”이라며 “‘신토불이’라는 개념처럼 어린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서는 국산농산물 재료 사용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은 “1,800개가 넘는 경기도내 학교에만 국산농산물을 공급해도 경기도 지역은 농업경제의 기반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 내에서도 부처간 입장이 다소 다르다. 우리농산물 소비정책을 펼치고 있는 농림부는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외교통상부는 WTO 규정에 따른 통상마찰을 우려하고 있고, 행정자치부는 외교부의 해석을 따르겠다는 쪽이다.
외교부는 WTO 협상이 진행됐던 90년대 초반만 해도 현재처럼 학교급식이 보편화하지 않아 학교급식에 국내농산물 사용여부가 중요한 의제가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외교부는 WTO 국가 가운데 자국산 농산물을 급식에 사용해 제소된 나라가 있느냐는 시민단체측의 질의가 잇따르자 “학교 급식에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를 의무화하거나 이를 조건으로 자치단체가 현물 또는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WTO 협정의 부속협정인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제3조 내국인우대조항을 위배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전북 道 의회 "대단히 유감" 교육청 "예상된 결과"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의회가 학교급식에 우리 농산물을 사용할 것을 규정한 조례를 의결하고 교육청이 무효소송을 제기했던 전북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찬반의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전북학교급식제정연대회의는 이날 성명을 내고 “학교급식조례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위배되는지 여부는 대법원에서 판결한 사안이 아니며 꼭 제소되어야 한다면 국제기구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면서 “이번 판결은 또 하나의 국치”라며 재판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연대회의는 “전국의 급식운동단체들이 국회에서 제대로 된 학교급식법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서둘러 판결을 낸 이유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전북도의회 이충국(50) 의원은 “우리 학생들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제정한 학교급식조례안이 상위법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패소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며 “자치단체 차원에서 관세장벽을 높여 외국의 수입물을 차단할 수도 있는 지방자치 선진국의 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전북도교육청 관계자는 “승소는 예상한 결과”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정부가 제정한 ‘학교급식지원조례 표준안’을 토대로 앞으로 품질이 우수한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주=최수학 기자 shchoi@hk.co.kr
■ 학부모· 시민단체 "대법, 너무 쉽게 결정"
교육ㆍ시민단체들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대체로 수긍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민주노동당 등 11개 시민ㆍ사회단체로 구성된 ‘학교급식법 개정과 조례 제정을 위한 국민운동본부’는 “WTO의 농업협정 내용을 근거로 우리농산물 사용을 위한 예산지원(현금지원)을 충분히 할 수 있고, 이는 GATT협정보다 우선 적용된다”고 이날 판결을 반박했다.
전국교직원노조와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번 판결이 WTO의 규정을 잘못 해석해 내려진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미국 일본도 학교 급식에 자국 농산물을 사용하는데 왜 우리나라만 문제를 삼느냐는 반응이다. 전교조 한만중 대변인은 “어느 나라 대법원인지 모르겠다”며 “국민 수백만명이 모여 추진한 운동이라면 그 취지를 파악하는 데 더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하지 않겠냐”고 비판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박경양 회장도 “대법원이 너무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닌가 한다”며 “어린 학생들에게 안전한 우리 농산물을 먹이겠다는 조례의 참뜻을 제대로 살렸으면 했다”고 밝혔다.
학교급식네트워크 이빈파 사무처장 역시 “대법원 판결은 유감”이라며 “우리 농산물의 일정 비율을 공공을 위해 소비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만큼 정부 측에 보다 구체적인 정책과 예산 집행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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