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울 태릉선수촌의 선수회관 앞. 이에리사(51) 선수촌장의 얼굴은 어린애 마냥 잔뜩 들떠 있었다. 지난 4월 사상 첫 여성 수장으로 부임한 이후 정말 모처럼 활짝 웃어본다는 이 촌장. “훈련 지원비로 5억원을 쾌척하기로 한 국민은행 김동원 부행장이 금방 도착한대요. 그 동안 체면 불구하고 줄기차게 훈련비 부족을 호소했는데 그 결실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 같아 가슴 뭉클하네요.”
국가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훈련비 부족으로 애를 태운 건 지난 7월부터다. 지난해 상반기엔 올림픽에 대비한 연인원 1,010명이 들어와 구슬땀을 흘렸지만 올해엔 하계 유니버시아드와 10월 동아시아대회를 비롯해 내년 토리노 동계올림픽ㆍ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를 줄줄이 앞두고 있어 배가 넘는 2,500여명이 훈련에 참여했다. 하지만 98억원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반기 들어 훈련일수를 줄이고 다른 예산을 훈련비로 전용하는 편법을 동원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10월과 12월은 훈련 중단을 계획하고 있을 정도.
이 촌장은 취임 때 “가족 같은 선수촌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큰소리 쳤다. 그런데 그게 배부른 소리였다. 비 줄줄 새고 곰팡이 냄새 풀풀 나는 체육관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예산에 훈련 일정을 맞추다 보니 교대로 선수촌에 입ㆍ퇴촌하는 지경까지 갔다. 훈련 할만 하면 다른 선수를 위해 퇴소하는 식이다. “맘껏 훈련하고 싶은 선수를 격려는 못할 망정 짐 싸서 내보내는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지금껏 잘 굴러갔는데 왜 갑자기 훈련비 타령이냐”는 목소리도 있다. 국회앞 1인 시위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과의 거리 행진 등까지도 생각했다는 이 촌장은 단호했다. “시대가 바뀌었으면 선수촌의 운영도 그에 걸맞게 개선돼야죠. 그렇지 않으면 선수촌의 낡은 건물처럼 태극마크의 가치도 점점 빛 바래고 무시당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최근 정부로부터 내년 예산의 대폭 확충을 약속 받은 이 촌장은 선수촌 후원 계좌를 만들어 전 국민의 동참을 유도하는 한편 기업들에게도 지속적인 도움을 요청할 계획이다.
한편 김 부행장은 “모쪼록 이 돈이 잘 쓰여 선수들 사기는 물론 우리 국민들 사기도 높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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