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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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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

입력
2005.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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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공화장실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고속도로 휴게소나 공원의 화장실에는 냉방이나 온풍 시설은 당연한 것이고 꽃과 좋은 글까지 장식되어 있어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등산로 옆에 자리잡은 화장실조차도 미생물 분해방식을 써서 비록 푸세식이지만 냄새도 거의 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휴지? 물론 있다.

그런데 공공화장실 가운데 유독 휴지가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학교 화장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가릴 것이 없다. 이런 현상은 서울에서 유독 도드라진다.

물론 걔중에는 학교측이 준비해서 휴지를 가져다 놓는 화장실이 있긴 하지만 그런 학교에조차도 휴지가 자주 떨어진다. 만일 다른 공공화장실이 이랬다면 당연히 이용자들의 질타를 받았을 것이다. 학교는 그렇지 못하다. 학생들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학교에만 없는 이상한 현실

이렇게 되고 보니 학생들은 저마다 휴지를 집에서 가져다 쓴다. 자기 휴지가 떨어지면 친구에게 빌려야지 학교에 요구하지 못한다. 머리가 굵은 고등학생들은 이럴 때 휴지가 있는 교사용 화장실을 ‘몰래’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겪는 교칙위반이나 죄의식 같은 것이 그들의 심성에 얼마나 비교육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학교에 휴지가 없는 이유는 뭘까. 서울시교육청에서는 “휴지를 위해 따로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다. 1995년부터 학교 예산의 집행을 학교에 일임했는데 학교 사정에 따라 운용을 한 결과”라고 말했다.

반면 학교측에서는 “수세식이 처음 보급되던 무렵만 해도 두루말이 휴지가 워낙 비싸서 사 쓰지 못한 관례가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워낙 휴지를 낭비해서 모두 감당하지 못한다”거나 “낭비를 예방하는 차원에서도 개인 휴지를 쓰게 하거나 교실에만 비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에게 살아있는 글쓰기를 가르쳐온 교육운동가이자 저술가이면서 지방의 초등학교 교사를 31년째 하고 있는 이호철(53ㆍ경북 성암초등학교)씨는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학교에서 마땅히 해줘야 할 것인데. 제가 다닌 학교에는 어디나 휴지가 있었습니다”라고 어이없어 했다.

학교에서 휴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생기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선 아이들이 불편을 겪는다.

두번째 문제는 공공재를 사용하는 법에 대한 교육 자체가 안 된다는 데 있다. 휴지를 너무 많이 써서 직접 가져오게 했다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내 것이 아니면 마구 써도 된다는 태도는 공공재를 쓰는 과정을 통해서만 교정할 수 있다. 마구 쓴다고 자기 것을 가져오라면 공공재를 쓰는 방식을 안 가르치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과정을 겪고 자라난 아이들은 공공재를 쓰는 방식이 매우 서툴러, 내 것이 아니면 함부로 써도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실상 제가 가져온 휴지도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절약을 가르쳐야 할 것인데, 이렇게 되니 기본적인 소양도 일러주지 못한다.

세번째로는 만에 하나, 학생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혜택을 학교가 가로채고 있는 경우로 그 교육적 해악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교육당국서 예산 반영해야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학교는 평범한 가정보다는 시설이 월등 나았다. 집에서는 쪼그리고 앉아서 공부를 해도 학교에는 책상이 있었고 화장실도 같은 푸세식이라도 불안한 나무판자가 아니라 튼튼한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집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옥수수죽과 옥수수빵, 우유 같은 것을 무료로 준 곳이 학교였다.

그러다가 70, 8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겪으면서 사적인 영역의 시설은 점차 좋아진 반면 공적인 영역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격차는 90년대를 거쳐 21세기에 이르면서 더더욱 커져만 간다. 그게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학교 화장실이다.

학교 화장실에는 휴지가 있어야 한다. 학교 예산이 미치지 못해서 학생들에게 가져오게 한다고 하더라도 화장실에 갖다 놓아야 한다. 거기서 교육이 시작된다.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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