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 스텔라 맥카트니는 그룹 비틀즈의 폴 맥카트니가 둔 딸이다.
그녀가 디자이너로 출발을 할 당시 만해도 아버지의 후광을 입는 듯 했으나 곧 감각적인 디자인과 실용성을 겸비한 ‘패션 아이콘’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뉴욕, 파리, 동경, 서울 어디에나 그녀의 옷을 보고, 입고 싶어 하는 멋쟁이들로 가득할 정도니까.
여성스러우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그녀의 옷은 입었을 때 편안한 특징이 있어, 모 스포츠 브랜드와 제휴하여 운동복을 출시하기도 했다. 얼마 전 매체를 통해 그녀의 다음 시즌 패션쇼를 볼 수가 있었는데, 과장되지 않았으되 다분히 환상적인 디자인에 관하여 리포터가 비결을 묻자 스텔라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 인생에 낭만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리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디자인의 원천이 ‘낭만’이라는 그녀의 대답이 다소 뜬금없이 들린다? 낭만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는 ‘낭만’을 가졌다는 것이 경쟁력일 수 있다는 말이다.
▲ 열차 오므라이스
나와 남동생이 초등생이었던 시절에는 여름마다 가족끼리 경주에 갔었다. 경주의 평화로움이 좋다는 엄마 때문이었다. 가족 넷이서 애용했던 교통 수단은 기차였는데, 기차에 오르면 아빠는 ‘으?X’ 하고 한 쪽 자리를 쓱 돌리시어 네 명이 마주 볼 수 있게 배치를 해주셨다.
매일같이 바쁜 아빠와 떠나는 여행이라서 엄마도, 우리 남매도 기차 여행은 언제나 설레는 여정이었다. 가족 넷이서 끝말잇기, 묵찌빠, 카드 놀이를 하면서 가다가 출출해지면 식당차로 자리를 옮겼고. 오므라이스나 함박 스테이크 따위를 나눠먹으며 아빠 엄마는 맥주를, 우리는 소다수를 마셨다.
돌이켜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흰 그릇에 노랗게 달걀이 씌워져 나온 오므라이스는 정말이지 탐스럽고 예뻤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밥 위로 빨간 케첩이 샤샥 뿌려져 있는 모습만으로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던 나.
아빠의 주문대로 ‘노른자’가 얹어 나온 함박 스테이크를 오물거리며, 새콤하게 볶아진 오므라이스를 떠먹으며 나는 기차 여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열 살을 전후해서 맛을 들인 나의 기차 여행은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 통일호를 타고 삽교역에 내려 수덕사를 다녔지만 이제는 통일호가 없어져서 새마을호로 예산역에 내려야 한다. 정읍역에 내려 마을 버스를 탈탈 타면 선운사가 멀지 않고, 목포역에서 내려 해남으로 들어가면 대둔산 자락의 대흥사가 나를 반긴다.
그 느릿한 움직임과 이어지는 창밖의 풍경, 철로가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소리의 몽롱함은 디지털 시대의 어떤 교통 수단도 흉내 내지 못하는 중독성이 있으니. 역에서 또 다른 역으로 내리면 다른 냄새, 다른 습도가 즉시 나를 맞아서 더더욱 이국적이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제는 기차 안에 ‘식당차’가 없다는 사실. 8년 전 ‘런던 - 파리행’ 고속 철도의 식당차에서 마신 한 잔의 와인이 아직도 생생한 ‘여행의 별미’였는데, 허겁지겁 열차에 오른 객들에게 차 한 잔 따로 마실 공간이 없다는 한국의 현실이 조금은 슬프다.
플래트홈 마다 문전 성시를 이루던 가락국수 집들은 이제 캔 음료와 과자가 전부인 편의점으로 싹 바뀌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미래에 ‘기차’마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두렵다. ‘낭만’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스피드’와 ‘편리’와 ‘돈’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 남산 길 돈까스
어쩌다 내가 운전을 할 때는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남산 순환도로를 타게 된다. 빽빽이 차가 밀리는 강남과 강북 사이에 턱 버티고 있는 이 산을 빙글 돌면서 큰 숨을 한번 쉰다.
나는 특히 남산의 초겨울을 좋아하는데, 가을과 겨울 사이 찬 공기가 돌 때쯤에 남산을 걸어 오르면 몸 밖은 적당이 차갑고 몸 안은 적당이 데워져서 아주 좋다. 굳이 서울 타워 근처까지 가지 않더라도 산등을 타고 천천히 걷는 것이 좋다.
소월길로 내려가 남대문 시장에 다다르면 따끈한 잔치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도 운치가 있지만, 케이블카 타는 곳부터 시작되는 돈까스 거리에서는 곧잘 발을 멈추게 된다. 어른 얼굴 만 한 돈까스에 멀겋게 끓인 순두부 일인분. 여기에 맥주라도 한 잔 씩 곁들이면 완벽하다.
특히 옛날 통닭집들처럼 돈까스를 덮는 빵가루에 카레 가루를 조금 섞어주면 감칠맛이 난다. 남산에 있는 돈까스 집에서는 크림 수프와 따끈한 밥, 그리고 풋고추와 쌈장을 준다.
조그만 접시에 담겨 나오는 묽은 크림수프는 옛날 경양식 집 메뉴를 떠올리게 하고, 큼직하게 썬 돈까스에 밥을 곁들여 입에 넣고 풋고추를 아작 씹어 먹으면 콧등에 땀이 송글 맺힌다.
낭만이나 로맨스 같은 단어들이 ‘사어(死語)가 되는 날, 이미 우리는 캡슐에 든 영양제로 연명하고 이미지와 사랑을 나누며 병에 걸리지 않는 영생을 얻은 기쁨이 무색하도록 지루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인생에는 빵과 힘으로만 채울 수 없는 허기가 있으니까, 또 그게 ’사는 맛‘이니까.
‘밤늦은 항구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뱃고동 소리를 들어 본다’는 최백호님의 노래 가사처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더 늦기 전에 다시금 새겨 볼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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