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10월 6~14일)가 올해로 10돌을 맞는다. 1996년 숱한 회의적 시각과 우려 속에 국내 첫 국제영화제로 출범한 부산영화제는 선발주자였던 도쿄(東京)영화제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아시아의 독보적인 대표 영화제로 자리잡았다. 불과 10년 만에 세계적으로도 열손가락에 꼽힐만한 수준에 오른 부산영화제의 성공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영화의 중흥과 궤를 같이한 부산영화제의 급성장 이면에는 부산시민과 영화 팬의 성원, 프로그래머와 사무국 직원의 땀방울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친화력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10년간 흔들림 없이 선장직을 수행한 김동호(68) 집행위원장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1년의 3분의 2 기간을 외국 출장으로 보낸다는 김 위원장은 영화제 개막을 눈앞에 두고 요즘 더 정신없이 바쁘다. 베니스영화제에서 5일 돌아오자마자 공항에서 미처 찾지도 못한 짐을 그대로 들고 8일 토론토영화제 현장으로 날아간다. 16일에는 후쿠오카영화제 참가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해외 영화인들을 만나 교류의 폭을 넓히고, 한국영화를 알리기 위해” 젊은 사람도 버거워 할 일정을 소화하는 그의 얼굴은 나이를 무색케 하는 영화제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다.
김 위원장은 “처음 영화제를 시작할 때는 지금 같은 성과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며 “영화제 성공 요인은 아시아의 신인 감독을 발굴해 세계에 알린다는 영화제 목적과 이를 뒷받침한 프로그래머에게 있다. 부산프로모션플랜(PPP)과 부산시민, 영화 팬도 큰 역할을 했다”라며 공을 돌렸다. 자신이 한 일은 “외부의 영향력이나 외압을 막고, 예산을 확보한 것 정도”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든든한 보호막 역할을 하며 독립성을 유지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들이 영화제를 통해 자신을 알리려 했을 때도 그는 모두 거절했다.
“서울 사람들이 왜 영화제를 좌지우지하느냐”는 일부 시민의 곱지 않은 시선과 압력도 견뎌냈다. 부천판타스틱영화제나 광주영화제가 집행위원장 자리를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였던 것과 비교하면, 그의 처신은 더욱 빛난다.
김 위원장은 한국영화의 해외소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을 영화제의 제일 큰 성과로 꼽았다. 최근 들어 칸영화제 등의 한국영화 초청이 잦아진 데는 부산영화제의 역할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PPP의 성공적 운용으로 아시아 영화에 제작비를 구해주고 합작의 길을 튼 것도 큰 수확으로 들었다.
그는 “외국에 나가면 부산에 초청해달라는 요청이 너무 많아 거절하기 힘들 정도”라며 “부산영화제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베니스영화제 기간에 그는 칸과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동일한 예우를 받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용극장이 없어 영화제 기간이 유동적이라는 것. 특히 내년은 극장가 대목인 추석이 영화제 개최기간으로 적합한 10월6일이라 난감한 상황이다. “2009년 해운대에 부산영상센터가 완공되면 해결될 문제지만, 내년에는 행사를 어떻게 치를지 벌써 고민입니다.”
김 위원장은 “올해 시작하는 아시아필름아카데미(AFA)와 내년 창설하는 아시안필름마켓을 발판 삼아 아시아 영상산업을 주도하는 영화제로 발전시키고 싶다”며 향후 10년에 대한 포부도 밝혔다.
그는 문공부 차관을 거쳐 88년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 사장에 취임하며 뒤늦게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공직 생활 30년도 의미가 있지만, 부산에서 보낸 10년이 생애에서 가장 즐겁고 보람찬 기간이었습니다. 만약 위원장을 그만두면 영화를 한번 만들어 볼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