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루이지애나주 주도 배턴 루지의 한 이재민 임시 수용소에서 흑인 노인 조셉 보스웰(83)씨는 침대 한쪽 끝에 외롭게 걸터앉은 채 안내방송이 나올 때마다 온 신경을 귀로 모았다. 뉴올리언스 침수 현장에서 구조된 후 이송과정에서 아차 하는 순간 잃어버린 동갑내기 부인의 소식을 행여 놓칠까 싶어서다.
조셉씨는 뉴올리언스 도심에 있던 집 지붕 위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닷새동안 사투를 벌일 때에도 항상 부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구조될 때 서로 다른 헬리콥터를 타기는 했지만 곧 다시 만난 부인의 행방을 눈앞에서 놓친 것은 이송 버스를 기다리며 잠시 긴장의 끈을 놓고 있을 때였다. 함께 살던 조카(54)도 이때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살인, 강간, 약탈. 뉴올리언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이 수용소에는 5,500여명이 서로 부대끼고 있었지만 이런 단어들을 입에 올리는 이재민은 없었다. 그만큼 이들이 겪은 참상이 악명 높았던 뉴올리언스 수퍼돔이나 컨벤션 센터에 비해 덜하다는 뜻이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한 대다 때때로 쿨럭이는 조셉씨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들이 남은 여생동안 감내해야 할 인생의 팍팍함이 무겁게 다가왔다.
이미 20여년 전에 은퇴해 연방정부 보조금으로 살아 온 조셉씨는 돌아갈 집이 없어졌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물으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나는 그를 보고 있다”고 말해 신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내비쳤다.
역시 흑인인 마슬림 프랑수아(66)씨는 매형(67)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부인(65)과 함께 뉴욕에서 뉴올리언스까지 문병을 왔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습격을 받았다.
간호 때문에 집을 떠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됐고 범람한 물은 1층을 휩쓸어버렸다. 2층으로 대피해 물과 과자 부스러기 만으로 연명해야 했던 고통스런 생활을 일주일간이나 버텨 냈다. 그러나 4일 도저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환자를 데리고 가슴 위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1km이상을 걷고 다시 7km를 더 걸은 후에야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프랑수아씨는 병든 매형을 데리고 자식이 있는 뉴욕으로 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나 병이 깊어진 매형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리버 컨벤션 센터에 마련된 이 수용소는 배턴 루지의 여러 임시 수용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편이었으나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렀을 때 한 흑인 젊은이가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고 있었다. 샤워시설이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탈출 또는 구조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거나 수용소에서 병을 얻었을 경우엔 역시 배턴 루지에 있는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실내 농구체육관에 설치된 임시 병원으로 옮겨진다.
5일 찾아 본 이 임시 병원은 수용능력이 175명에 달했으나 실제 입원 환자수는 채 20여명이 되지 않아 썰렁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임시 병원측이 수용 기준을 너무 까다롭게 해 문턱을 높인 결과 실제 혜택이 유명무실해진 것 아니냐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재민 수용소든 임시 병원이든 공통된 것은 미 당국이 매우 까다로운 보안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용소에는 입구에 금속 탐지기까지 설치, 한번 출입할 때마다 매번 줄을 서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고 병원에서는 농구장 내에 마련된 병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차례의 검문을 거쳐야 했다.
사진을 촬영하는 데에도 갖가지 제약이 따랐다. 안전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정치적 파장을 의식한 미 당국이 지나치게 고압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 같았다.
배턴 루지=고태성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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