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나 ‘풀’ 따위의 잘 알려진 작품을 쓴 시인의 이름이지만, 우리 시단에는 또 다른 김수영이 있다.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1996년)과 ‘오랜 밤 이야기’(2000년)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한 바 있는 김수영(金秀映: 38)이 그다. 비록 한자 표기가 다르기는 하지만(‘풀’의 시인은 金洙暎이다), 동명의 후배가 앞 세대의 큰 이름을 필명으로 비켜 가는 문단의 관례를 젊은 김수영이 따르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에게는, 등단할 때부터 이미, 제 이름이 저 유명한 선배 시인의 흡력(吸力)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이 튼튼한 바탕을 지닌 것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오랜 밤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오랜 밤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독자가 문득 어떤 기시감(旣知感)을 겪지 않기는 쉽지 않다. 유년기의 기억을, 더러는 설화적 감수성으로 버무리며, 찬찬히 더듬어 가는 시편들에서 백석(白石)의 그림자를 엿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백석이 시집 ‘사슴’에서 고향 정주를 위해 수행한 언어의 길쌈을 김수영은 고향 마산과 그 언저리에 대하여 베풀고 있다.
시인 자신이 이 시집의 후기에서 아예 “나는 아직도 북마산역 기찻길을 따라 북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붉은 철대문집에 살고 있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시집의 해설을 쓴 양애경은, ‘오동나무 장롱’ 연작에서, 김수영이 백석과 주고받은 숨결을 느낀다. 그 느낌이 틀렸달 순 없지만, 백석의 그림자가 한결 더 짙게 느껴지는 것은 차라리 ‘겨울밤’ 같은 작품에서다.
‘겨울밤’의 도입부를 보자. “벽장 속에는 새끼를 낳은 고양이 살찐이와 그 새끼들이 갸르랑거리고, 매운 바람이 뒤란 감나무 가지 끝에서 윙윙 우는 밤이면, 나는 오줌이 마려워 할머니 품속에서 칭얼대다 까무룩이 잠에 빠지곤 했는데, 어느새 나는 검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우리집 창고 뒤로 가서 창고 아래 굴속을 걷고 있다.
/ 꼭 내 몸에 맞는 그 굴은 가도가도 끝이 없어 숨이 턱턱 막혀오고, 굴이 점점 좁아져 꼼짝달싹 못하게 그 깊은 속에 갇혀버리면 어둠 저편에서 기어나온 털북숭이 짐승이 나를 누른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던가”.
김수영의 이 시행은 백석의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늬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어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고야(古夜)’)는 추억과 온전한 켤레를 이룬다.
유년기 백석의 ‘외발 가진 조마구(난쟁이)’는 유년기 김수영의 ‘털북숭이 짐승’과 나란하다. 진동수가 엇비슷한 ‘사슴’의 목소리와 ‘오랜 밤 이야기’의 목소리는 서로 접촉하고 간섭하며 은은한 맥놀이를 만든다.
나는 지금 김수영이 백석의 아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김수영이 백석의 애독자든 아니든, 문학의 질료라는 것이 흔히 아스라한 기억의 곳집 속에 쟁여져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다.
그 기억 속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 언어의 피륙을 짜내는 길쌈 솜씨에서 김수영은 백석에게 뒤지지 않는다. 사실은 김수영의 베가 백석의 베보다 때깔이 더 좋다. 이것은 어쩌면 솜씨 차이 때문이라기보다 실의 품질 차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독자들에게, 1930년대 이전의 짙은 서북 방언으로 짠 백석의 베가 20세기 말 표준한국어로 짠 김수영의 베보다 얼마쯤 더 칙칙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시 말해 김수영의 추억이, 시공간의 유리함에 부분적으로 신세를 졌다 하더라도, 백석의 추억보다 독자들의 마음줄을 더 세게 퉁겨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추억의 공간 속에다, 김수영은 “언제나 내 편인 할머니”(‘통시에 빠진 돼지’)를, “젖먹이 동생을 무릎에 앉힌 어머니”(‘팔걸이가 있는 낡은 의자’)를, “사철나무 울타리 아래 묻힌 우리집 고양이 살찐이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을 나가버린 살찐이 새끼들”(‘밤의 이야기’)을, “밤새 낚싯짐을 싸는”(‘아버지와 나와 지렁이’) 아버지를, “달빛 아래 흰빛을 뿜어내던 치자나무”(‘기찻길 옆 붉은 철대문집’)를, 그리고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 사잇길”(‘정선선 기차’)과 “산 채로 기름가마에 튀겨지거나 팔다리가 찢긴 귀신들”(‘오동나무 장롱 3’)을 정겹게 배치한다.
유년의 기억이 으레 그렇듯, 김수영의 유년 추억에도 더러 두려움이 배어있다. 그 두려움은 흔히 자신이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어느 순간 문득 숨(결)이 멈추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어린 화자들은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는 저 그림자들”이 “울타리 넘어 내가 잠든 장지문을 단숨에 열고 들어와 밤마다 내 숨결을 훔치고 가”는 것을 상상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잃어버릴 때의 무서움”(‘밤의 이야기’)을 느끼고, “그 (털북숭이) 짐승이 내 숨을 빨아들여 점점 커지면서 내 눈앞에 붉고 푸른 불덩어리들이 너울거리”는 악몽을 꾸는가 하면, “내 숨이 할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 늙은 할머니에게 힘을 불어넣기를 기원한다.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화자의 애착은 물기를 찾아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식물뿌리처럼 어기차다.
시집의 해설자도 지적했지만, ‘오랜 밤 이야기’는 물의 이미지로 축축하다. 그 물기는, 습기는, 화자가 유년의 추억에서 놓여나는 제3부에 들어가서야 겨우 잦아든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물기와 습기는, 그 촉촉함은 화자가 불러낸 기억의 감촉이다. ‘오랜 밤 이야기’ 속에서 유년의 추억은 이내(嵐氣)처럼 아스라하고, 그 아스라함을 거드는 것이 이 물기다. 많은 시인들의 상상력 속에서 물의 이미지는 흔히 죽음과 연결돼 있지만, ‘오랜 밤 이야기’ 속에서 그것은 생기에 줄을 대고 있다.
그 물기는 “잘 갈아진 찰진 흙의 몸내”(‘밭을 안고 있는 집’)를 만든다. 김수영의 언어와 상상력 속에서 물은 우물, 늪, 호수, 샘, 연못, 밤하늘, 만월 따위로 번져나간다.
이렇게 넘쳐나는 물의 이미지 뒤편에 불의 이미지가 가만스레 숨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시집에는 물의 화가 모네와 불의 화가 고흐가 함께 등장한다. 물기와 불기의, 서늘함과 뜨거움의 이런 동거는 서정적 자아의 갈증을, 어떤 간절함을 부각한다.
그 갈증은 “갈증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드리우면/ 나를 잡아끌던 검은 물의 태반”(‘검은 우물 2’)이나 “샘은 그 목마른 뿌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고목나무샘’)에서처럼 노골화하기도 하고, “시든 꽃 같은 닭들을 싣고/ 간신히 고개를 넘는 낡은 트럭”(‘백년찻집’)이나 “고흐의 자화상을 걸어놓고/ 나는 그의 푸른 두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고흐의 자화상을 걸어놓고’)에서처럼 간접화하기도 한다.
고흐의 푸른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 그림자 없는 불꽃”이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눈이 그렇듯, 물기의 거처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 “물과 불로 증오심만 벼리”(‘살아있는 상처’)기도 하지만, 그 둘의 결합을 아름다운 원융(圓融)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사실 (고흐의) 눈을 이루는 물기와 불기의 동거는 이 시집에서 더러 이상이나 향도(嚮導)의 상징물 노릇을 하는 ‘별’(예컨대 ‘야광주’의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밝게 피어나는 별들”이나 ‘모래 속에 누워 있던 여자’의 “물이 있는 곳, 푸른 풀과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별자리”)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불과 물을 동시에 끌어안고 있는 그 별은 “수백년 묵은 죽은 나무의 뿌리가/ 품고 있는 옹달샘”(‘고목나무샘’)과도 같다.
‘오랜 밤 이야기’는 기억의 곳집에서 길어낸 서늘한 물이다. 화자들이 기억 속에서 불러낸 “흔적으로 남은 생의 한 순간”(‘팔걸이가 있는 낡은 의자’)들을 엿보고 나니, 이제 알겠다.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이지만,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오래된 여행가방’)임을. 그 추억은 현실의 “모래알 같은 쓸쓸함”(‘모래 속에 누워 있던 여자’)을 잠시라도 눅여줄, 마른 목을 잠시라도 적셔줄 물 같은 것임을. 김수영은 “그가 빠졌던 숱한 구렁/ 그 굽이에서 건져올리는 저 질긴 소리”(‘해금을 켜는 늙은 악사’: 이 시행은 아마 시인 자신의 예술관일 것이다)를 통해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오랜 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젊은 시인의 유년 이야기는 죽은 시인의 ‘거대한 뿌리’ 앞에서 버젓하다. 굳이 필명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는, 젊은 김수영의 판단은 옳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은화(隱畵)
인적 없는 습지에 갔다.
수초 무성한, 깊은 곳에
잠이 없는
큰 메기가 살 것 같은 습지.
잿빛 왜가리가
탁한 물속을 보고 있다.
물이 흐르는 쪽으로
굽은 그림자, 외다리로 선 발목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것들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
단단한 바닥이 된다.
마음속을 휘젓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슬픔만이
눈앞을 흐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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