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은 모든 색을 탈거시키는 동시에 포괄한다. 흑백으로 재현된 풍경은 일견 심드렁하고 심심해 보이지만 들여다 볼수록 온갖 다양한 감정과 심상이 물 밑의 움직임처럼 드러나지 않은 채, 잔잔하게 고여 있다. 때문에 아무리 범상하고 고요한 장면이더라도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낯설고 기이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흑백은 천천히 다가와 은은한 파문처럼 마음에 새겨지는 음악 소리를 닮았다. 그것은 보는 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명처럼 떠돌다가 불현듯 마음의 깊은 바닥에 깔려있는 시간의 잔해들을 일으켜 세운다. 전혀 다른 시공 속의 풍경이 낡은 시간의 켜들을 허물어뜨리며 그려내는 마음의 절경들. 흑백은 사물의 그림자이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그림자이다.
아울러 흑백은 죽은 시간의 현현이다. 흑백은 시간을 고정시키는 동시에 흘려 보낸다.
흑백으로 포획된 시간은 죽어있는 듯 앙상하고 밋밋해 보이지만 어둠과 빛이 버무려낸 사물들의 음울한 윤곽은 쉼 없이 꿈틀거리고 있다. 흑백은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의 풍성한 움직임을 매 순간 되살려낸다. 그리하여 늘 현재화된다.
그 잠정적인 현재는 그러나 과거를 미래로, 미래를 다시 과거로 되돌려 보내는 시간의 중첩 지대일 뿐, 어떤 사물도 그 자체로 완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미동도 없이, 고체로 얼어 붙은 듯한 풍경은 사실, 끝없이 흐르는 유체에서 일순간 포획된 물고기처럼 흑백의 그물 속에서 또 다른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럴 때, 흑백은 사물 속에 담겨 있는 숨은 시간을 풀어내는 열쇠와도 같다. 그런데 그 열쇠가 끼워 맞춰지는 어두운 구멍은 수시로 그 형태를 변화시킨다.
이상의 ‘흑백론(?)’은 컬러가 일상화된 현대에서야 뒤늦게 추론할 수 있게 된 흑백의 특수한 존재론이다. 사물의 표면에서 고유한 빛깔을 삭제해 영원으로 떠넘기는 흑백의 마술은 천차만별한 현실 세계를 하나의 톤으로 중성화함으로써 전혀 다른 위상 차원을 창조해 낸다.
일견 기술적인 결락의 잉여로 여겨질 수도 있는 흑백의 그러한 속성은 현실의 복제를 넘어 시간의 재창조에 기여한다. 흑백은 그 자체의 한계로 인해 새로운, 특별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흑백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별함을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 사물들의 디테일에서 발견해낸 앙드레 케르테즈는 ‘현대 사진의 개척자’라 불린다. 그는 컬러로는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세계의 나직한 비밀들을 흑백의 미묘한 음영들 속에서 토로해 낸다.
그의 사진은 고요하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평범하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선 풍경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특별한 소리들이 흘러 나온다. 빛과 어둠의 대비에 의해 붙들린 사물들의 표면은 지극히 일상적으로 여겨지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의미와 용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을 드러낸다.
그 세계는 애초에 감춰져 있던 게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 빛과 그림자 사이, 그리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사진가의 눈과 셔터를 누르는 한 순간의 결단이 총체적으로 발견해낸 유일무이한 세계이다.
여느 학파나 유행에서 거리를 둔 채 과묵하고 독단적인 직관으로 사물들의 눈을 뜨게 만든 앙드레 케르테즈는 흑백을 통해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내성 깊은 음악을 연주해낸다.
그리하여 사물들 사이에서 수시로 쓰여졌다가 지워지는 우주적 호흡의 시편들을 시각화한다. 문고판으로 번역되어 나온 앙드레 케르테즈의 사진집(이영준 옮김, 열화당)엔 이런 헌사가 실려 있다.
‘이 새로운 리얼리즘(일차 대전 후 이것은 ‘신 즉물주의’ 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은 사진의 황금 시대로의 귀환, 새로운 세례 선서와도 같은 것이다.
세계는 과학적인 윤곽과 정확한 선, 생생한 대조와 미묘한 음영을 통해 ‘있는 그대로’ 고정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럴 때 사진 작가란 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인데, 그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주관성으로 혼란을 확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세계에서 읽을 수 있었던 표현의 요구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사진 건판 위에 고정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거기에서 자신의 영속적인 생명과 존재를, 아니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이해 가능성을 획득하기 위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니엘 살르나브
앙드레 케르테즈의 사진은 냉엄하게 얼어 붙은 세계의 표면을 더더욱 차갑게 얼리는 방식으로 사물들의 표정을 단일화한다. 한 순간 사로잡힌 사람들의 얼굴에선 감정이 지워져 있고 사물들은 그 자체의 물질성을 낯설게 비튼 채 고립되어 보이지만, 그 무표정과 무미함은 몇 개의 반복적인 화음으로 신비롭고 불가해한 감성을 드러내는 어떤 음악들을 연상케 한다.
그의 사진을 지배하고 있는 건 렌즈에 붙들리는 순간 만물이 은은하게 화답해 보는 불가해한 우주의 내재율이다. 그건 모든 소리를 탈거시킨 상태라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는 우주?단속적인 리듬감을 재현한다.
소리의 평균율을 지극히 단순화한, 보다 침묵에 가까워지려는 음악. 모든 감정을 탈색시킴으로써 비로소 강한 공감의 울림통을 대기 중에 띄워 올리는, 한없이 냉담하면서 한없이 부드러운 음악. 오로지 세계가 감춘 소리의 결들을 토닥토닥 떨리게 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정서를 단단하게 농축시켜 들려주는 그 음악은 막막한 그리움과도 흡사하다.
천천히 다가와 은은한 파문처럼
마음에 새겨지는 음악이다, 흑백은…
마치 전혀 알지 못하는 어느 공간에서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대를 직접 겪은 듯한 먹먹한 느낌이 낮고 단조로운 소리의 반복구를 통해 드러난다.
그걸 경험하는 것은 흑백 사진 특유의 추상화 기능이 마음 속에 숨은 현들을 건드려 오랫동안 갇혀 있던 내면의 새를 꺼내게 하는 과정과도 같다. 그 새는 하얗게 빈 하늘 한 가운데 수줍은 점으로 찍혀 풍경 저편에 감춰진 ‘자신의 영속적인 생명과 존재’와 조우하게 만든다. 앙드레 케르테즈의 사진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그 새의 이름은 스물 여섯 살에 요절한 영국의 포크 가수 닉 드레이크이다.
1948년 6월 19일 미얀마에서 태어난 닉 드레이크는 두 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다. 만능 스포츠맨이자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전도 유망한 청년이었던 그는 자신의 섬세한 손끝으로 빚어내는 어쿠스틱 기타의 신비로움 음감과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색이 이루어내는 소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유인력의 억압으로부터 살짝 비껴선 듯 가벼우면서도 중후하게 비상하는 그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폐곡선을 그리며 복잡 다단한 감정의 선들을 유려하게 펼쳐 보인다.
그는 절대 목소리를 드높이거나 과다하게 복잡한 선율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자신의 감정을 작고 새하얀 탁자 위에 정물인 양 올려 놓은 채 그것이 발화하는 나직한 소리들을 무심하게 인화하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 세상 모든 사물들의 고요한 표피에 얹어 만물의 속삭임으로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의 숨은 마음을, 마치 건판 위에 걸어놓은 인화지처럼 걸러낸다. 그 어떤 호소나 흐느낌도 없이 단지 섬세한 마음의 끌로 끄집어낸 그것들은 빨래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을 간헐적으로 포착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한 순간을 극명하게 웅변하는 나른한 오후의 옥상 풍경을 연상케 한다.
아무도 없으나 모든 것이 존재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아스라한 진공 상태. 모든 것을 감춤으로써 세계의 숨은 원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침묵과 공허의 앙상블. 그건 일종의 밝은 우울함이다.
닉 드레이크의 노래는 우울하지만 무겁지 않다. 느린 듯 경쾌하고 어두운 듯 밝다. 우울할 때 들으면 기분이 되려 상쾌해지고 즐거울 때 들으면 마음의 분방한 열기에 미지근한 습기를 흩뿌리며 순간마다 일변하는 마음의 깊은 자리를 수시로 보살피게 한다. 그건 앙드레 케르테즈의 사진에서 감별된 흑백의 존재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의 음영을 반복적으로 표상하는 흑백의 소리는 그 나지막한 반복구를 통해 세계의 다른 지평을 꿈꾸게 한다. 앙드레 케르테즈의 사진이 사물들과 빛의 운동 사이에서 다른 세계의 기미를 포착해내듯 닉 드레이크는 지극히 단순화한 소리의 패턴과 별 굴곡 없이 가볍게 유영하는 듯한 목소리로 현실세계를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제 3의 감각을 표출한다.
순간마다 일변하는 마음의 깊은 자리를
보살피게 하는 흑백사진이다. 그의 음악은…
앞서 그를 새에 비유했던 건 이 때문이다. 닉 드레이크의 감성은 허공 중에 점으로 찍힌 새의 시점이나 바람의 울림통을 떠올리게 한다.
새든 바람이든 어쨌거나 그건 온갖 색들이 천변만화하는 이 휘황한 세계를 다른 체계로 파악하게끔 만든다.
그걸 발견하는 건 분석적 이성의 시선이 아닌, 감각의 첨단에 위치한 얇으나 깊은 물리적 표면에 의해서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은 예민한 감각의 솔기들. 흑백은 그 미미한 감각의 봉제선에 닿아 수시로 재탄생된다.
흑백은 최초 창조자의 손끝에서 마감된 이후, 다시 오지 않을 미래의 풍경들을 선험적으로 깨닫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유물인 흑백에 과거란 없다. 언제나 새롭게 발견될 미래를 과거 속에서 미리 발견해낼 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