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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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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약탈

입력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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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9일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침공 20일 만에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뒤 바그다드는 약탈자들의 세상이 됐다. 약탈자들은 상점과 관공서, 외국공관 등에 몰려가 쓸 만한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이 소장돼 있던 바그다드 박물관도 털렸다.

연합군은 사담 후세인의 압제에서 선량한 이라크인들이 아니라 약탈자들을 해방시킨 것 같았다. 지난 3월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을 때도 대규모 약탈 사태가 벌어졌다. 수년째 인종 분규가 빚어지고 있는 수단 다르푸르에서는 약탈이 일상적인 일이다.

▦ 일시적 치안공백 상태에서 벌어지는 이런 형태의 약탈이 후진국만의 일이 아님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엄청난 재해를 입은 미국 뉴올리언스의 상황이 잘 말해 준다. 길가에 시신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데 약탈과 방화, 강간, 차량 탈취 등의 폭력이 난무했다니 지옥이 따로 없다.

뉴올리언스 경찰이 구조작업을 멈추고 치안유지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어서 주방위군까지 계엄군으로 투입됐다. 약탈자들은 호텔과 병원, 심지어 노인 요양소까지 습격했고 구호품 수송 차량에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 뉴올리언스 인구 중 흑인이 70%를 넘는다고는 하나 연령과 인종, 계층을 불문하고 약탈에 나서고 있다니 인간 본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든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번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재산과 사회질서를 존중하는 시민의식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다고 한다.

약탈은 시민의식이나 민주주의, 문명 수준과는 관계 없다는 얘기다. 치안부재라는 혼란 상황이 인간 내면에서 숨어있는 마성을 깨우는 것이다.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는 1992년 LA폭동 때도 극심한 약탈 사태가 벌어졌었다.

▦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1995년 2월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 심각한 치안 부재와 심리적 공황 상태 속에서도 약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치안 부재 상태였지만 약탈은 없었다. 두 사례는 극한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이 유지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물론 문화와 전통적 유대감 등에서 한국과 일본은 다인종 국가인 미국과 크게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뉴올리언스의 약탈사태는 세계를 향해 민주주의와 인권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외치는 미국 사회의 도적적 기초를 다시금 생각케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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