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산정(山丁) 서세옥(徐世鈺) 전이 3일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개막됐다. 10월3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일찍이 동양화의 현대적 해석작업으로 한국화단에 거대한 산을 이룬 서 화백의 예술적 전모를 고스란히 드러내보이는 자리다.
그 대단한 명성과 권위에 비해 일반관객과 마주칠 기회가 유난히 적었던 그가 자신의 예술역정 전반을 흔쾌히 펼쳐보이는 모처럼의 전시회다.
그는 무송재(撫松齋.소나무를 애무하는 집이라는 뜻)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나무가 울창한 그의 서울 성북동 작업실 구석구석에 쌓인 그림들 가운데 한국화 68점, 스케치 56점, 전각 127점을 골랐다.
“이번 기회에 그림들을 정리하다 보니 별게 다 나오더군요. 식당에서 냅킨에 끄적거린 스케치들, 사실은 그게 진짜 그림입니다. 세수도 안 하고 머리 빗질도 제대로 안하고 나왔을 때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인 것처럼 말이지요.”
산정은 약관 스물에 첫 국전에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을 탔고 스물 여섯에 서울대 미대 교수가 됐고, 서른 둘에 이미 국전 심사위원이 됐을 정도로 일찍이 천재성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1960년대 묵림회(墨林會)를 이끌며 한국화의 현대적인 변화를 모색했을 때는 주변인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도 숱하게 들었다.
여전히 대상의 충실한 재현이 그림으로 여려지던 그 시대에 극히 절제된 몇 번의 붓 놀림만으로 자연을 담고,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으니 충분히 그럴 법 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그려진 ‘인간 시리즈’는 그러한 서세옥 화풍의 절정이자 결정체다. “이것은 춤을 추는 사람, 이것은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이에요. 사람이 꼭 사람처럼 생겨야 됩니까?”
그래서 산정의 그림은 형상에 갇히지 않은 채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이 담백하다. ‘만 권의 책을 읽은 해박함’이 도리어 그를 형상과 인식에서 해방시키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붓 터치는 확실히 시원하고 깔끔하다. 농묵, 담묵, 파묵, 발묵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산정의 말대로 바람 불고 천둥소리 일어나듯 번뜩이며 내리쳐진 선들이다.
고독한 사람, 어우러진 군중, 활기차기 춤추는 인간 무리,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최소한의 선들로 담아냈다. “내 선은 딱 한번만 가요. 지난 곳은 절대 다시 가지 않습니다. 인생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작업 할 때 그는 전화선도 뽑아버리고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한다. 한번에 해야 하는 작업인데 그 느낌이 끊겨버리면 다시 다잡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대작을 즐기는 그는 키만한 붓을 들고 반바지만 입은 채 종이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작업한다. 이렇게 다져진 체력과 몸매가 30대 못지 않다고도 자랑했다.
이번 전시에는 50년대 말부터 그린 극도의 추상화 ‘점의 변주’, ‘선의 변주’ 등을 비롯, 닭과 염소, 연화를 소재로 선과 담색으로 표현한 작품들과 60대가 넘어 본격적으로 했던 전각 작업들, 그의 화론을 담은 서예, 한시집 ‘무송재시고(撫松齋詩槁)’ 까지 공개된다.
“완벽한 인생이나 예술은 없습니다. 항상 미완이지요. 만약 있다면, 그것으로 붓을 놔야 겠지요.” 그의 말을 듣자니 일흔 여섯의 나이에 여는 이 전시회도 아직은 한참 더 가야 할 길에 잠깐 숨을 고르는 중간결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02)2022-0613.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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