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6일 정부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 관련된 3만5,000여 쪽에 달하는 문서 일체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51년부터 65년까지 14년간 이루어진 한일회담의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다.
한일협정 문서 공개 이후 세간의 여론은 문서 속에 담겨진 내용의 함의보다는 협정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일 외교의 정치적 성격과 책임 공방에 더욱 열을 올리는 것 같다.
물론 한 시대의 중차대한 외교 행위를 주도했던 인물과 세력이 외교 교섭 과정에서 국가의 자존과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느냐는 시대가 지나도 반드시 그 책임 소재를 묻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통하여 살펴 보아야 할 핵심은 식민 강점 기간 중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 책임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 이다.
문서 공개를 전후하여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한국 정부의 한일협정 관련 문서 공개를 비웃기나 하듯 종군 위안부 문제 등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불법 행위는 이미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종결된 사항인 만큼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없다고 일축했다.
●반인륜적 행위 형사 책임 발행
일본의 이러한 태도는 53년 한일회담 일본측 대표였던 구보다의 ‘식민통치 은혜론’과 같은 망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의 기본입장은 일본의 조선 강점은 국제법상 ‘합법적’이었으므로 일본의 법적 책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강점기간 중 한국인들이 받은 ‘유감스런’ 피해는 한국 정부의 청구권을 받아들여서 소멸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36년 지배는 합법적이었다. 아니면 증거를 대라’는 식의 후안무치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정부의 주장은 국제법상 중대한 모순이 있다.
첫째, 일본의 한국 강점 과정이 합법적이었냐는 점이다. 일본의 조선 강점에 있어서 법적 도구가 되었던 소위 을사늑약, 정미7조약 및 합방조약은 국제법의 기본 원칙과 절차를 송두리째 무시한 강박에 의한 조약 체결이었다.
국가 대표를 협박하여 체결된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것이 당시에도 관습국제법상 인정되던 절대 원칙이었으며, 이는 35년 하버드 법대가 기초한 조약법 초안인 하버드 보고서 제32장과 이를 기초로 63년 유엔 법사위원회가 작성한 국제법의 법전화를 위한 보고서 제35조에도 명문화되었다. 오죽하면 당시 조약법 편람에 강박에 의하여 체결되어 원천 무효인 조약의 예로 을사늑약을 예시하고 있겠는가.
둘째, 청구권 협상 타결로 일본은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저질렀던 온갖 만행에 대한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이다. 일본은 회담 내내 협상 타결로 지원하는 돈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금이 아닌 청구권이라는 명목의 유ㆍ무상 경제협력 차관과 원조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일본의 입장은 ‘합법적’인 조선 통치 과정에서, 당시에 일본인이었던 조선인들이 실제 일본인들에 비하여 불공정한 처우를 받은 것만을 민사상 보상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저지른 일본군위안부나 징용 등 인적ㆍ물적 수탈과 이 과정에서 행해졌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형사 책임은 회피하였던 것이다. 침략범죄, 강제위안부, 고문 등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뉘른베르그와 동경전범재판을 통해 국제법상 강행규범 위반으로 확인된 바 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형사적 책임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고이즈미의 발언은 민사적 배상을 통하여 형사적 책임을 회피해 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3만쪽 문서 심도있는 검토해야
이번에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는 국제법상 조약의 원문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참조가 되는 준비작업문서로서 한일협정의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단초가 된다. 3만 쪽이 넘은 1차 사료를 특정 분야 학자 몇 명이 짧은 기간 동안 열람하고 단언적 평가를 하는 것은 무리이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시간을 가지고 심도 있는 검토와 해석을 시도하였으면 한다. 이를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한일협정 문서가 새로운 한일관계의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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