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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여행 - 통일의 관문 開成·南에 성문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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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여행 - 통일의 관문 開成·南에 성문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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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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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따라 개성의 문도 열렸다. 분단 이후 55년 만이다.

8월 26일 처음 실시된 시범 관광은 당일 치기 일정인 까닭에 많은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관광 도시로서의 개성에 내재된 가능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박연폭포, 선죽교, 성균관 등 자연과 문화가 바로 거기 숨쉬고 있었고, 이방인을 환대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주민들도 함께 했다. 짧고도 길었던 개성 여정을 풀어 본다.

개성 시내에서 대흥산성까지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 도로나 진배없다. 파란 하늘과 벼 익는 들녘에 풍년의 예감이 짙게 서려 있었다. 버스안에 탄 사람들과 벼베기에 바쁜 농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흔들었다.

창 밖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산 꼭대기까지 텃밭이 자리잡았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벼, 옥수수, 채소를 심은 탓이다. 심각한 연료난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지만 외지인에겐 이마저 이국적 풍경이다.

시내를 나선 지 50분, 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100m남짓한 진입로에 아스팔트가 깔려있다. 시범 관광을 앞 두고 새로 깐 흔적이 역력하다. 북한 주민들도 평소 이 곳을 방문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20여m 올라갔을까, 세찬 물줄기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박연폭포다.

박연이 품은 놀라움은 기대 이상이었다. 물 줄기는 거대한 화강암 돌덩이를 둘로 가르며 수직으로 떨어진다. 최근 몇 차례 내린 폭우 덕에 몸집이 불어난 높이 37m의 폭포는 장관을 연출했다. 황진이의 감흥이 절로 살아날 것만 같다. 폭포가 떨어져 형성된 담소(어미담)는 바닥이 투명할 정도로 깨끗하다.

보다 가까이서 폭포를 보기 위해 용바위에 오른다. 원래는 담소를 지나야 하지만 조그만 다리 덕에 물을 적시지 않고 건널 수 있다. 대신 바위에 오르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파편을 고스란히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제법 더운 날씨였지만 몇 분이 지나기 전에 한기가 감돈다.

어른 키 높이에 작은 방만한 너비의 화강암 바위는 거대한 낙서장이다. 내로라는 풍류객들이 다녀가면서 이름과 시구를 새겼다. 이 중 초서체로 휘갈겨 쓴 글씨가 인상적이다.

‘비류직하 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물줄기 내리 쏟아 길이 삼천 자,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한 구절이다. 황진이가 자신의 머리채에 물을 묻혀 일필휘지로 썼다는 전설이다.

사실일 리야 없겠지만 박연폭포에 대한 황진이의 애정이, 북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제 아무리 여산폭포라고 해도 박연폭포에 비하면 아녀자의 머리채로나 휘갈겨 쓴 글씨 밖에 되지 않는다는 함의를 깔고 있을 터. 어찌 됐든 황진이가 후에 이 시에 화답이라도 하듯 ‘박연폭포’라는 한시를 지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샘 쏟아질 제 은하수가 의심되고/ 성낸 폭포 비겼으니 흰 무지개 다름없다(중략)/ 려산승경 좋다고 세상사람 말 말고서/ 우리 조선 제일가는 이 천마(박연폭포)를 볼지어다.’(북한 향토사학자 송경록의 ‘개성 이야기’에서)

폭포를 마주보고 선 범사정은 웅장한 박연폭포의 위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범사정을 지나 산길을 따라 대흥산성 북문으로 향한다. 서화담의 흔적을 좇기 위해서다.

황진이가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칭했던 연인 서화담은 산성 동쪽에 자리잡은 성거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 임을 보기 위해 십리길을 걸었던 여인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한동안 사람의 방문이 없었던 지 돌바닥의 이끼조차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길을 올라 북문에 도착했다.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걸려있는 홍예문을 지나 성문 위에 버티고 선 누각을 돌아 내려가니 바위를 가운데 두고 푹 패인 소(沼)가 나타난다. 바로 박연(朴淵)이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용왕의 딸과 같이 살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개성 실향민들은 연못의 모양이 바가지와 닮아서 유래했다며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펴놓기도 하는 곳이다.

힘들게 오른 산성에는 관광객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간이 매점이 마련돼 있다. 물건을 판매하는 여성 안내원들의 미모가 예사롭지 않다.

“황진이의 후손”이라느니, “역시 남남북녀”라는 말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두서 없이 튀어나온다. 판매대에는 뱀술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디에 좋으냐”며 한 관광객이 짐짓 짖궂게 묻자, “알면서 왜 묻느냐”며 받아 치는 솜씨가 일품이다.

딱히 실향민들만의 마음이었을까. 몇몇 일행은 이미 바닥에 술판을 벌였다. 신명 나는 장단이 어우러지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안내원 한 명이 팔을 걷고 서투른 솜씨로 가야금을 연주한다.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는 그렇게 성큼성큼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개성=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개성관광 불거리

박연폭포만이 아니다. 고려 500년 도읍지였던 개성은 시내 전체가 유적지이자 관광지이다. 북한의 대도시이기도 한 터라 버스에서 차창 밖으로 보는 시내 풍경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금강산 유람이 자연 유산을 둘러보는 관광이라면 개성에서는 살아 숨쉬는 문화를 살펴보는 여행이다.

선죽교는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 관광의 핵심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철퇴에 맞아 숨진 역사의 현장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실망감이 앞선다.

길이 6.77m, 너비 2.54m. 다리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너무도 초라하다. 언뜻 눈으로 보면 그렇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다리 주위를 감싼 참죽이 정몽주가 죽은 후 충절의 의미에서 솟아났다고 전한다. 선죽교(善竹橋)라는 이름도 이 사건 이후 생겨났다.

자세히 보면 다리가 둘이다. 이 중 하나는 난간으로 둘러싸인 채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다리 끄트머리에 약간 붉은 빛 기운이 감도는 얼룩이 보인다. 당시 정몽주가 흘린 피라고 전해진다.

정몽주의 후손인 정호인이 1780년 조상의 피를 밟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 기존 다리를 폐쇄하고, 옆에 새로 놓은 것이 지금의 다리이다. 당시 정호인의 세도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앞에는 하마비(下馬碑ㆍ말에서 내려야 통행이 가능하다는 의미)라는 비석이 눈에 띈다.

하마비 옆에는 성인비가 서 있다. 일년 내내 비석이 젖어 있다고 한다. 북측 안내원은 비석이 정몽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성인비 옆의 또 다른 비석에 새겨진 선죽교라는 글씨는 대단한 달필이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 알고 보니 그 또한 개성 출신이다.

선죽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몽주의 생가도 있다. 16세기 전국에 서원 설립붐이 일면서 이 곳도 숭양서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정몽주의 충절과, 서화담의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았을 정도로 유서 깊다.

고려성균관은 ‘성균관=조선 시대의 교육 기관’이라는 상식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곳이다. 992년 국자감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됐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한 국내 최초의 대학인 셈이다.

서울의 성균관보다 500년을 앞선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17세기 초에 개축한 것. 넓은 뜰에 심어진 천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성균관의 세월을 짐작케 한다. 두 나무 모두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대다수 건물은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제2전시장에 진열된 조그만 쇠활자. ‘이마 전(顚)’자가 새겨진 이 활자는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에서 발견된 것으로, 12세기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로 찍은 글씨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것보다 300년을 앞선다고 한다. 별자리를 그려놓은 천문도도 흥미롭다. 은은한 빛깔이 감도는 고려자기도 맛깔스럽게 전시해 놓았다.

개성의 신혼부부들이 좋아하는 관광지도 있다. 선죽교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한 표충비이다. 암수 거북 위에 새겨진 돌 비석으로, 이 곳에서 기원을 하면 자식을 잘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을 그들은 믿는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비석이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55년 만에 이 곳을 찾은 실향민들은 6ㆍ25전쟁이 나기 전에도 표충비가 울어댔다고 회고했다.

개성=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개성관광 먹을거리

북측이 시범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식당은 자남산여관, 개성민속여관, 통일관, 영통식당 등 모두 4곳.

취재진이 방문한 자남산여관은 객실 19개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유럽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이름난 숙소이다. 식당앞에서 여성 안내원이 시원한 물수건을 제공하는 등 세련된 서비스가 인상적이다.

둥근 테이블에 개성의 전통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우선 개성 특산 약밥이 눈에 띄었다. 은행, 대추, 곶감, 꿀, 잣 등 갖은 약재가 들어간 건강식이다. 녹두, 고사리, 도라지로 버무린 삼색나물도 맛깔스럽다.

두부육전, 떡합성, 계란볶음, 오이소박이, 깻잎쌈찜, 돼지고기편찜, 종합냉채, 닭고기장과 등이 반찬으로 놓였다. 찹쌀을 재료로 만든 떡인 우메기는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 개성 처자가 시집갈 때 신랑집에 보내는 폐백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쫀득쫀득하면서 달짝지근해 간식으로 먹기에 좋다.

주식으로 내놓은 쌀은 황해북도 배천지역에서 수확한 것으로, 콩나물국과 함께 제공됐다. 반주로 나온 5도짜리 봉학맥주와 25도의 령통소주는 남한의 술 맛과는 조금 다른 색다른 느낌. 술을 마시다가 잔이 적당히 비면, 안내원이 와서 술을 가득 부어주는 것도 남한의 음주 문화에 비추어 낯설게 느껴졌다.

시범 관광 내내 관광객으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관광지마다 마련된 간이 매점에서 판매하는 청량 음료. 500㎖들이 페트병에 ‘코코아 탄산단물’ ‘모란봉 레몬 탄산단물’이라고 적힌 음료는 한국에서 판매하는 콜라, 사이다와 모양과 맛이 흡사하다. 한국의 음료보다 단 맛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한창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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