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겨울은 춥다. 기온과 강설량은 서울과 비슷해도 고층 건물 일색인 맨해튼의 바람은 그야말로 칼 같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이방인들은 ‘뉴요커’ 흉내를 내보려 블랙 외투에 블랙 부츠로 멋을 내고 걸어 보지만, 내 집이 아닌 빌딩 숲은 춥기만 하다.
특히 미국인들이 모두 집으로 모여드는 성탄절이나 연말 연시의 텅 빈 거리는 홀로 지내는 이방인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목도리를 코까지 올려 감고 애써 바람을 막아가며 뉴욕 다운타운(down town)을 걷다가, 24시간 연중 무휴인 ‘다이너(diner)’에 들어선다.
‘기사 식당’ 마냥 연중 쉬지 않고 밤낮으로 문을 열며, 식대도 저렴하여 주로 학생들이나 근로자들, 혹은 밤길 운전 중 들른 여행객들이 주 고객인 식당. 추수감사절이나 정월 초하루에도 반겨주는 ‘다이너’는 외로운 겨울을 견디는 이방인들에게 따뜻한 아지트가 된다.
♥ 치킨 수프
우리가 ‘감기’하면 ‘콩나물국’을 먹듯이, 미국인들은 감기 기운이 돌면 ‘치킨 누들 수프’를 찾는다. 말 그대로 맑게 끓인 닭 수프에 밀가루 가닥을 넣은 것.
원래는 닭 한 마리를 뼈째 고아 육수를 내고 그 국물을 기본으로 수프를 만들어야 맞지만, 바쁜 뉴욕에서는 ‘치킨 스톡’이라 불리는 닭 육수로 대신한다. 대파와 양파를 닭고기와 볶다가 육수를 붓고 팔팔 끓이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고, 여기에 통후추를 갈아 넣으면 그 냄새만으로도 코가 시원해져서 몸살에 특효다.
치킨 수프와 아울러 ‘다이너’에 꼭 있는 단골 메뉴로는 ‘튜나 멜트(tuna melt)’라 불리는 샌드위치가 있다. 별것은 아니고, 식빵 사이에 노란 슬라이스 치즈와 캔에 들은 참치를 넣고 토스터기에 구워 낸 메뉴다.
이때 참치는 양파를 다져 넣은 새콤한 드레싱이나 마요네즈에 한 번 버무려서 쓰기도 하는데, 치즈가 쩍 녹아 붙은 빵과 함께 베어 물면 맛있다.
치킨 수프와 튜나 멜트로 속을 채우고 두꺼운 머그잔에 담긴 아메리칸 커피를 마시면 옛날에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떡국 따위가 생각나 고독한 망명자 같은 감상에 젖는다.
♥ 야채수프
뉴욕의 다운타운을 거슬러 조금 더 올라가면 미드 타운(mid town)이 나온다. 동쪽으로는 유엔 본부, 서쪽으로는 정육 시장을 비롯한 도매상들이, 그 가운데에는 브로드웨이가 있어서 그야말로 ‘바쁜’ 동네다.
외국계 지사나 각종 오피스들이 밀집된 지역인 만큼 점심 메뉴를 빵빵하게 갖춘 식당들이 즐비한데, 바로 이 지역에서 오래 성업하는 길거리 가게가 하나 있다. 어느 모퉁이의 길을 막아 판자를 세우고 제법 예쁘게 지어 단 간판까지 갖춘 이 집은 바로 ‘수프 전문점’.
한 평 남짓한 칸막이 안에 깔끔히 정리된 간의 부엌이 있고 단정한 모자를 쓴 아저씨 셰프가 새벽부터 준비해 온 수프를 파는 곳이다. 기본 메뉴 서너 가지에 그날 그날 들고 빠지는 스페셜 수프가 있는데, 점심 시간이면 그 수프를 먹으려는 직장인 줄이 코너를 돌고 돌아 버스 정거장까지 이어진다.
수프 집의 유명세가 이어져서 유명 시트콤에도 등장할 정도가 되고 나니, 이 수프 한 그릇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는 손님들의 얼굴에는 뿌듯함 마저 감돈다.
특히 감자를 크게 썰어 넣고 케첩을 풀어 만든 ‘야채 수프’는 새콤하게 입맛을 당기고 배도 부르기 때문에 인기가 좋다. 각종 야채를 케첩에 볶다가 육수를 부어 끓이는 그 맛은 옛날 ‘경양식집’에서 먹던 그런 정감이 있어 동양인 입맛에도 익숙하다.
♥ 크림수프
치킨 수프나 야채 수프와 같이 크림을 사용하지 않고 만드는 수프는 칼로리가 덜 나간다는 점에서 미국인들에게 환영받는다. ‘크림 = 살(fat)’이라는 그들의 고정 관념이 만든 저지방, 무 지방 식품들은 대게 버터나 크림을 ‘인공 향’으로 대체하여 만든 발명품들이니까.
그래서 버터에 볶던 재료를 블랜더에 갈아 농축액으로 만들고, 이 농축액에 다시 크림과 우유를 부어 완성 짓는 ‘크림 수프’는 언제나 망설임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고유 명절인 ‘추수 감사절’마다 호박(pumpkin) 크림 수프가 빠지지 않고 메뉴에 오르는 이유는 추수 감사절에 ‘호박’을 먹는 전통이 있어서다.
11월, 12월을 지내며 할로윈 축제,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까지 호박 수프, 호박 파이, 호박 캔디 등 호박을 거덜 낼 정도로 많이 먹는 전통이다. 푹 익혀 만든 호박 농축에 크림을 부어 가며 끓여낸 크림 수프는 조리법이 다소 ‘프렌치(french)’지만 호박을 먹는 계절 동안은 잠시 미국 음식이 되어 많이들 찾는다.
겨울밤이 긴 우리나라에서도 야식으로 본디 ‘호박죽’을 많이들 먹지 않나. 이뇨작용을 돕고 식이 섬유도 풍부한 호박으로 만들면 죽이든 수프든 다 맛있다.
19세기의 프랑스 소설가 플로베르. 그는 ‘멋진 수프를 만드는 데에는 샴페인보다 많은 양의 정신이 요구된다’고 했다. 즉 간단해 보이는 국물 음컥?뿐이지만 ‘제대로’ 맛을 내려면 보통 노하우로는 힘들다는 것. 추위를 뚫고 걸어온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는 자비, 좋은 재료를 모두 녹여 한 숟갈의 예술로 만들려는 장인 정신을 갖춘다면 ‘멋진 수프’ 맛을 낼 수 있잖을까?
치킨수프
닭고기 200그램, 대파 1/2대, 양파 1/2개, 샐러리 약간, 통후추, 버터 40그램, 밀가루 1큰 술, 닭 육수
1. 냄비에 달고기, 채 썬 대파, 다진 양파, 샐러리를 볶은 다음 덜어낸다.
2. 1의 냄비에 버터를 녹이고 밀가루를 넣어 볶다가 육수를 붓는다.
3. 2에 1과 통후추 몇 알을 넣고 끓인다.
야채수프
감자1개, 양파 2/3개, 당근 1/2개, 토마토 1개, 바질 잎 3장, 월계수 잎 1장, 대피 약간, 버터, 케첩, 육수, 소금, 후추.
1. 냄비에 버터(혹은 기름)를 녹이고 감자, 당근, 양파, 토마토를 볶다가 케첩을 넣고 섞는다.
2. 1에 육수와 생수를 붓고 월계수 잎과 대파 흰 부분을 넣어 감자가 익도록 끓인다.
3. 2에서 월계수 잎과 대파를 건져내고 바질잎을 넣고 약불에 뜸을 들이다가 소금, 후추로 간한다.
**육수로는 맑은 국(콩나물 국 등등) 국물도 좋다**
호박 크림수프
늙은 호박이나 단 호박 300그램, 우유 1/2컵, 생크림 3큰 술, 생수 약간, 소금, 흰 후추, 버터
1. 호박은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서 버터에 볶는다.
2. 1에 물을 조금 붓고 푹 익혀서 믹서에 간다.
3. 2를 다시 냄비에 붓고 우유를 넣어 저어가며 끓인다.
4. 3이 걸쭉해지면 생크림을 넣고 소금, 후추로 간한다.
**호박과 함께 감자와 당근을 조금씩 넣으면 맛이 풍부해진다**
푸드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