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의 멜로가 수 많은 추종자를 낳았던 것은 역설적으로 잔인했기 때문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으되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주인공의 죽음이었고, ‘봄날은 간다’는 평범한 사랑이 가져다 준 상처를 놀랍도록 담담하게 그려냈다. 남녀를 쿨한 듯 무심한 듯 바라봄으로써 사랑의 신화를 무참히 깨어버리고 어느새 현실 속 사랑과 닮은 꼴로 만들어 버리는 잔인한 멜로는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데 ‘외출’(제작 블루스톰ㆍ감독 허진호)은 잔인하지 않다. 영원한 사랑, 변해가는 사랑을 거쳐 이제 변질된 사랑이라는 가장 기막힌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시사회 직전 허감독과 주연 배우들은 “이들의 슬픔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건 쉽지가 않다.
이는 한류스타 배용준의 캐스팅에서 오는 태생적 한계다. 배우자의 배신을 앞에 두고도 그는 몸서리 치지 않으며 세상이 허락치 않을 사랑을 하면서도 능청스럽다. 심지어 베드신에서도 심하게 점잖고, 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사과만 깎아준다.
그는 불륜남 인수로 카메라 앞에 서면서도 자신을 아시아의 스타로 만들어 준 ‘겨울연가’의 준상 이미지, 즉 절대 바람 피울 것 같지 않은 건강한 소년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불륜과 순수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이미지가 균열을 만들어 내면서 이해보다는 이질감만 준다.
시사회장에서 만난 한 일본 기자의 “욘사마의 베드신이 너무 격정적일까 봐 밤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품위를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처럼 그는 순정남 준상의 이미지는 지켜냈으나 인수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의 빈약한 감정 표현을 보면 ‘스캔들’ 출연 당시 강조했던 “변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는 자세와, 당시의 비열함과 순정함의 절묘한 교차점 연기에서 오히려 퇴보한 듯 하다.
더 나아가 일본에서 그의 대단한 인기와 일본 팬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순수남 이미지가 배우로서 배용준에게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영화가 보여준 사랑에 대한 불길한 시선이다. 불륜은 불륜으로 극복할 수 밖에 없다는, 같은 상황에 처해 봐야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시각은 일견 진보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가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같은 불륜 드라마 속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쉽게 알 수가 없다.
불륜에 보편성을 부여해 세상사의 아이러니에 대한 통찰로 끌어 올리려는 시도도 살짝 엿보이긴 하나, 카메라는 인수와 서영의 사랑에 대한 서정적인 묘사에만 치중해 이 또한 허망한 시도가 됐다.
물론 국내 시사회 후 쏟아지는 혹평에 서운해 할 수도 있다. 한류를 발판 삼은 모처럼의 대형 기획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 될 수도 있고, 이제 겨우 세 편째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에게 예전만 못하다는 말도 지나칠 수 있다.
허 감독 스스로 “전에는 자연스러운 장면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이 방식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고 밝혔는데 여전히 전작의 스타일만 요구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하지만 멜로의 귀재 허 감독과 아시아의 스타 배용준이라는 다시 없을 결합이 만들어낼 파괴력에 대해 기대가 컸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떠들썩한 마케팅과, 엄청난 개런티를 받고 출연한 한류스타에 대한 실망만 남긴 ‘잘못된 외출’이 아닌지 걱정된다. 8일 개봉. 18세.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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