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거부
세상이란 참으로 묘하다. 세계는 미국이 전광석화처럼 승리했다고 자랑한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과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미국을 패퇴시킬 수는 없겠지만 미국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하지는 않는 방법을 배웠다. 미군이 어느 전장에 이미 진입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이후에는 패퇴시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미군 집결 사진 첨부).
따라서 미국의 진입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그래도 무리하게 진입을 시도할 경우 미국이나 그 동맹국이 입을 엄청난 피해를 깨닫게 한다. 미국 스스로 무력 행사를 중지하고 정치적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럴만한 능력을 가진 접근거부 무기체계, 즉 비대칭 전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바로 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 디젤-전기추진 잠수함, 더욱 정교해진 기뢰(機雷) 그리고 고속 전투함 등이다.
이런 차원에서 미 군사당국은 중국이 러시아로부터 구입한 소브레메니(Sovremenny)급 구축함과 여기에 장착된 SS-N-22 썬번 순항미사일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대단히 염려하고 있고, 그런 염려를 반영한 군사 보고서가 수 없이 많다. 이번 러시아와 중국의 합동 군사 훈련에도 이 구축함과 미사일이 등장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이 이 미사일을 역 설계하여 전세계에 공급하기 시작하면 미국 해군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이 배치하기 시작한 독일-미국 공동 개발 RAM(Rolling Airframe Missile)이 썬번을 격퇴할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 하나만으론 절대로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니꼴라에프(Nikolayev) 조선소에 가면 팔리기를 기다리는 슬라바(Slava)급 순양함 한 척을 만나게 된다. 예산 부족으로 건조가 96%나 진행된 상태에서 중단됐지만 한 때 소련 해군의 명성을 드높이던 전함이다. 필자도 1997년 이 함정을 구경한 적이 있다. 당시는 6억 달러를 요구했었다. 최근의 국제 군사 정보에 의하면 중국이 이 함정을 구매할 의사를 보였고,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5억 달러를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거리 550km(297해리)의 P-500 바잘트(Basalt) 함대함(Surface-to-Surface) 미사일이 장착됐고 국제적으로 ‘항공모함 킬러’라 불린다. 이 거래가 성사된다면 미국의 항공모함, 상륙함 또는 대형 전투함에 대응할 수 있는 중국의 능력이 대폭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해도 아직은 중국이나 다른 나라로부터 함대 대 함대(Fleet-to-Fleet) 해전으로 도전 받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미 해군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광범위하게 확산된 효과적인 접근거부 무기체계(Anti-Access Weapon System)의 위협에 이미 직면해 있음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미 해군이 꼭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관문(關門ㆍ Choke Point)이나 미군이 접근하려는 연안에 배치된 비대칭 무기체계는 세계해군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다. 미국의 군사적 대응이 주목된다.
그 대부분의 중요한 해로와 관문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사활이 걸린 길목이다. 미국의 군사적 대응과 우리의 안보 이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해군은 흐름을 통제한다는 말을 거듭 되새긴다.
해상 위험
세계화가 확대됨에 따라 해상 운송의 수요는 커지는 데 그 공급은 두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다. 첫째, 해상 운송로 그 자체, 즉 관문의 지리적 위치와 형태로부터 생긴 제약이고, 둘째는 특정 국가나 그룹에 의한 안전상의 위협이다.
우선 중동에서 오는 우리 유조선의 항로, 그 길에 도사린 위험과 위협을 알면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다. 그 외 석탄 천연가스 철광석 등 모든 주요 물자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우리나라. 배 한 척, 한 척이 험난한 바다 길을 거쳐 우리 항구에 들어온다.
호르무즈(Hormuz)해협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 쿠웨이트 국적 유조선이 이란의 위협 때문에 이 해협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11척 모두 미국 깃발을 달고 미 해군 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통과했다.
요즈음 매일 1,500만 배럴 이상의 원유가 이곳을 통과하여 세계로 퍼져 나간다. 가장 좁은 수역은 왕복 각각 겨우 폭 2km, 그 왕복 해로의 중간에는 폭 4km의 완충 해역이 있다. 이처럼 좁은 전략적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이란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다. 95년 이란이 해협 입구 아부 무사(Abu Musa)에 6,000명의 군대와 중무기를 배치했을 때를 비롯하여 이란 해군이 해협 밖에서 기동 훈련을 할 때면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의 통행이 상당 기간 지연되고 그 때마다 세계 석유 시장은 한 바탕 요동을 쳤다.
말라카 해협
인도양에서 남중국해와 태평양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세계 해운의 3분의 1이 통과하고 매일 300척 가까운 선박이 왕래한다. 이 해협은 깔때기 형상이다. 길이가 800km, 남쪽 逃?가장 좁은 곳이 8해리, 북쪽 입구는 126해리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미국이 말라카 해협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높이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말라카 해협을 거치고 난 후에 바로 싱가포르 해협이 있다.
인도네시아 해협 1996년, 인도네시아가 아치펠라고의 세개 해로(쟈바섬과 수마트라섬 사이의 순다해협, 발리섬과 롬복 사이의 롬복해협, 그리고 몰루칸해)에 대해 상선 및 군함의 통행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결국 미국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이 제한은 해제됐지만 같은 일이 언제 다시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남중국해 남중국해의 상황은 아주 심각하다. 중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1992년 남중국해의 95%가 자국의 영해라고 선언했다. 중국-일본 간에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센가꾸섬(중국이름 釣魚島), 그리고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부르나이 말레이시아 등이 모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난사(南沙ㆍ Spratly)군도도 이 해역에 포함된다. 베트남과 중국간에 무력 충돌도 있었다.
이 지역에서 상선이 군사 행동의 표적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만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상선들은 멀리 우회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수송로가 일시적으로 봉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적대국을 향하는 일반 상선에 대해 어느 국가가 통행을 거부하거나 봉쇄할 위험도 있다.
증가하는 위험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이 위험 물질을 선적한 선박을 탈취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항구나 육상 시설을 공격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 예멘에서 자살 공격 보트가 프랑스 유조선 옆에서 자폭한 사건이나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이 유조선에 충돌하여 화재를 일으킨 사건 등은 그런 공격의 시작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액화석유가스(LPGㆍ Liquefied Petroleum Gas)를 선적한 유조선이 폭발할 경우 그 위력은 리히터 규모 11의 지진과 같고 반경 25km 지역이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이라 한다.
해상 운송 중인 핵 물질의 탈취 위험도 제기된다. 유럽에서 재처리 된 플루토늄을 운반해가는 일본 수송선도 그 대상이다. 재 처리된 플루토늄 235kg을 해군 함정의 호위도 없이 운송하던 일본이 국제 반핵운동 단체는 물론 안보 전문가들로부터도 호된 비판을 받았다. 영국 군사 잡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의 편집장 클리포드 빌에 의하면, 선뜻 믿기지는 않지만, 농축 우라늄을 보통의 폭약으로 감싸 폭발시키는 간단한 방법만으로도 엄청난 재앙을 가져 올 수 있다고 한다.
미 해군력 투사와 우리 해군력
이처럼 비대칭 접근거부 무기체계의 위협과 접근 통로의 제약이 미 해군력 투사 전략 변경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해상 운송로의 보호와 통제를 위한 전력 투사 수요가 대폭 확대된 반면 그 제약 요인 또한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분쟁 예상 지역에 미리 진입, 배치하는 것으로 미국의 전략이 변경됐다. 접근거부 능력이 발동되기 전에 미리 진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상 기지 건설과 운영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고 다른 위기 지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해군력을 전진 배치, 시현(Presence. 示顯)하려 한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해군 함정의 건조가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 해군이 추진하고 있는 대양해군 건설 계획, 전략기동함대 창설 계획에 따른 플랫폼의 건조와 연결돼 있다. 미국은 우리 해군을 미국이라는 세계해군의 지역 해군에 편입하려는 속 깊은 계획을 가지고 접근한다. 우리는 현재까지 이런 시도를 거부하고는 있지만 미국의 자료에 나타난 미사일 방어 체제 구상은 이런 속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자료. 미사일 방어 네트워크)
다음 회에는 우리나라 해군력 건설을 살펴보면서 가장 시급하게 갖추어야 할 능력과 우리가 유지해야 할 미국과의 거리를 가늠하려 한다.
윤석철 객원 기자 ys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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