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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에누리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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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에누리의 정치학

입력
200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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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거래에서의 에누리 관행을 평가하는 데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그것을 정(情)을 나누는 미풍양속으로 보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상호 불신이 초래한 비효율적인 시간ㆍ에너지 낭비로 보는 것이다. 그 어느 쪽이건 이젠 유통의 산업화ㆍ대형화로 인해 에누리는 희귀한 것이 되어가고 있고, 제도화된 ‘바겐 세일’이 에누리를 대체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우는 아리 젖주기식 정부정책

상거래에서의 에누리는 사라져가고 있는 반면, 정치사회적 거래에서 에누리는 날이 갈수록 그 위세를 더해가면서 타락 양상마저 보이고 있으니 묘한 일이다. 이익 분배 기능을 갖고 있는 정부를 상대로 한 거래와 갈등에선 이른바 “우는 아이 젖 더 주기 신드롬”이란 게 오래 전부터 맹위를 떨쳐 왔다.

누가 더 세게 오래 우느냐에 따라 정부의 정책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협상 과정에서의 에누리를 염두에 두고 아예 처음부터 세게 치고 나가는 건 모든 정치사회적 거래와 갈등에서 상식이 되고 말았다.

그건 두말할 필요 없이 ‘신뢰의 결여’ 때문이다. 중앙정부ㆍ지방정부ㆍ공기업ㆍ대기업 등 힘 있는 기관들이 평소 민원을 적극적 자세로 해결해 왔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 민원을 방어적으로 대한다. 민원 담당자들이 자신의 직무평가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민원을 무슨 오물 처리하듯이 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줄’과 ‘빽’을 동원하거나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나서면 무리한 민원도 잘 해결되고, 그게 없이 항의조차 약하게 하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마저 침해 당한 채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게 법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삶의 법칙이 ‘언어 인플레이션’을 불러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주 작은 동네 시위 하나를 보더라도 구호들이 한결같이 극단적 표현들을 총동원하면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모두 다 ‘목숨을 거는 건’ 기본이 되고 말았다. 덩달아 힘 있는 기관들도 기선 제압을 당하지 않겠다는 듯 처음엔 강경 일변도로 나가는 바람에 ‘강경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신뢰의 결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물론 그건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의 업보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지금도 입으로는 신뢰를 부르짖으면서도 온몸으로는 신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공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그렇다.

정치인에서부터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개혁파’로 알려져 있지만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보수파’이면서도 신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된다.

그런데 일반 대중은 ‘신뢰’보다는 자신의 이념ㆍ정치지향성을 우선시하면서 공인을 평가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바로 그런 ‘이념ㆍ정치 패거리’ 현상이 신뢰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정치인 말보다 신뢰로 평가를

이건 ‘이념ㆍ정치의 과잉’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공사(公私) 이중잣대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삶의 대인관계에선 신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못난 정치의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돌리지만, 그렇게만 볼 건 아니다. 그간 유권자들은 신뢰를 소중하게 여긴 정치인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주지 않았다. 정치인들에게 물어보라. 신뢰? 피식 웃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답을 내놓을 것이다. 물론 공개적으론 그렇게 답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신뢰 없는 에누리 정치,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정부와 정치권은 개혁이니 뭐니 하는 구호에 앞서 신뢰를 생명처럼 여기는 풍토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 모든 분야에 걸쳐 언어의 가격정찰제가 시급하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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