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쓸까말까 많이 망설였다. 어떤 논쟁을 위한 글도, 그렇다고 어떤 발전적인 제안을 위한 글도 아닌 해명성의 글을 쓴다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하게는 나의 졸역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아야 하며 ‘20세기 최대의 서사시’라는 평대로 강호의 온갖 고수들의 날카로운 혜안을 기다려 계속 수정하고 가다듬어나가야 하리라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 도박, 백화점, 철도, 매춘까지 온갖 분야를 다루는 이 책을 한 명의 역자가 감당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역부족일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저자가 13년 동안이나 매달리는 바람에 개념과 용어상의 통일성, 서지상의 정확성 등은 또 얼마나 문제적이란 말인가. 역자가 아무런 주석도 없는 독일어판 원서와 함께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잘 읽지도 못하는 일어판을 참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서평자는 먼저 번역판의 텍스트 편집이 문제라며 “상이한 성격을 가진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러할까? 독일어본에서는 발터 벤야민이 쓴 글과 자료로 발췌해둔 인용문을 글자 크기로 구분한 반면, 불어본과 영어본에서는 서체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따라 ‘활자 크기는 동일하되 서체와 농도’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벤야민 본인의 글은 문장을 들여 쓰기로 시작하는 동시에 가로 길이를 길게 한 반면, 인용 부호로 시작되는 인용문들은 가로 길이를 짧게 처리했다. 따라서 적어도 다섯 가지 방식으로 양자를 구분해놓았는데, 다른 외국어판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두 번째로 서평자는 ‘Physiognomie’를 ‘골상학(骨相學)’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며 이를 단적인 오역의 예로 들었다. 이것을 보면서 한 영문학 전공자가 영남대 법대의 박홍규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학’이라 번역하지 않았다며 비판한 기억이 떠올랐다.
문제의 대목은 이렇다. “아케이드의 ‘모습’은 보들레르의 ‘너그러운 노름꾼’의 시작 문장에 나와 있다.” 이어지는 보들레르의 글은 거꾸로 이 대목에서 ‘Physiognomie’를 ‘모습’이 아니라 ‘골상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오역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 않는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 책에 나오는 똑같은 ‘부르주아’라는 용어도 만약 중세적 맥락이라면 ‘성 안 사람’이,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라면 ‘시민’이나 ‘부르주아’가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또 ‘과잉 친절’로 지적한 독일어-프랑스어 용어 해제는 실제로는 역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프랑스어판에서 원용한 것이다. 또 역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것을 감히 ‘한국어의 표준 번역’으로 제시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산책자, 만보객, 산보자 등 아직도 ‘한국어의 표준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해 ‘나는 이렇게 번역하니 별다른 오해가 없길 바란다’는 자진 신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평자의 지적대로 전문가들의 선행 연구를 참조해야겠지만 오히려 전문가들의 의견 자체가 갈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도권 밖에 있는 역자로서는 제도권 안의 따뜻한 시선은 언감생심이지만 이런 식의 거친 ‘전문가’의 조언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조형준 ‘아케이드 프로젝트’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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