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22일 세이타는 죽었다.” 이 첫 문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작가의 문장이 아니면 전쟁고아 남매의 죽음에 대한 서늘하도록 담담한 묘사를 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계속 본문을 인용한다.
“세이타는 산노미야 역 구내 기둥에 구부정하게 기대 앉아 있다. 기둥은 장식타일이 떨어져나가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고, 세이타는 바닥에 엉덩이를 철퍼덕 대고 양다리는 앞으로 뻗은 채 앉아 있다.
보름 전쯤이었다. 산노미야 철교 밑 암시장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역 구내에 있으면 배는 고파도 물만은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갑자기 조용해지는 건 밤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밤에는 밤의 소리가 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밤의 소리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득해 가던 세이타가 퍼뜩 정신이 들어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 콘크리트 바닥이 보인다. 세이타는 자신이 처음 앉았던 자세에서 기역자로 몸이 꺾여 옆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이타는 오늘이 며칠이지, 며칠일까, 얼마나 지난 걸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세이타는 죽었다.
한밤중, 온몸이 이로 들끓고 있는 세이타의 옷을 흠칫흠칫 조사하던 역무원은 세이타의 복대 속에서 작은 알사탕 통을 발견했다. 달캉달캉 소리가 나는 그것은, 야구 투구 폼을 잡고 역 앞의 불탄 자리, 여름 잡초가 우거진 부근의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떨어지면서 하얀 가루가 쏟아지고, 작은 뼛조각 세 개가 굴러 나왔다.
하얀 뼈는 세이타의 여동생, 세츠코의 것이었다. 세츠코는 한 달 전인 8월22일 방공호 속에서 죽었다. 만 네 살 나이에 다리도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잠자듯이 세상을 뜬 걸 보면, 죽음의 원인은 오빠 세이타와 같았을 것이다. 영양실조에 의한 전신쇠약.”
해군 대위로 순양함을 타고 전쟁에 나간 아버지에게서는 언제부터인가 편지 한 통 없고 엄마는 폭격을 맞아 저 세상으로 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같은 본능만 남은 비정한 어른들 틈에서 중학생 오빠와 어린 여동생은 그렇게 석 달 반 동안 서서히 죽어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사람들의 태도 따위는 밀어두자. 전쟁과 인간에 대해서만 느끼자.
우리 집에는 이 책의 애니메이션인 ‘반딧불의 묘’가 있다. 아들의 애장품이다. 그런데 단지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로 나는 관심도 갖기 않았다. 그뿐인가? 만화, 만화영화, 판타지소설만 보는 아들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매체가 아니라 내용이 아닌가. 진실도 경험을 해야만 깨달은 나, 주말에는 아들의 책장과 소장품을 살펴볼 참이다.
/강은슬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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