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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문서 공개/ "독도 폭파하자" 발언 日이 먼저 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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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문서 공개/ "독도 폭파하자" 발언 日이 먼저 꺼내

입력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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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에서는 한일간 논란이 됐던 사안이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도 확인됐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 공방과 간도 회복을 위한 주일대표부의 지침은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했던 외교전의 단면을 드러냈다.

또 박정희 정권이 한일 외교협상을 하면서 당시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음이 김종필_오히라 메모와 어업협정 대책회의 문서에서 확인됐다.

독도문제 - 日 "국제사법재판소 가자" 집요

공개된 문서에서 일본은 회담 기간 내내 독도문제를 의제로 끌어들여 분쟁지대로 만들려고 했음이 드러났다. 53년 4월 시작된 2차 한일회담 어업분과위 회의에서 일본은 평화선을 부정하기 위해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뒤 62년 2월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일본 외상이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한국측이 응소하길 바란다”고 압박했다.

고사카 외상은 같은 해 3월 최덕신 당시 외무장관을 만나 “현안이 해결되더라도 영토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교정상화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협박도 했다.

심지어 62년 9월 한일 예비절충 4차회의에서 일본 외무성 이세키 유지로 아세아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라며 “크기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국교정상화 이후 논의하자며 섣불리 국제문제가 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김종필 부장은 62년 10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을 만나 “독도문제는 회담 초부터 한일회담과 관계 없던 것을 일본이 공연히 끄집어 낸 별개 문제이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응소)할 수 없다”며 “양국 국교정상화 후 시간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11월 독도문제의 제3국 조정론이 제기되자 주일 한국대사관은 “일본의 강력한 요구에 대해 몸을 피하고 사실상 독도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이라고 설명한 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결국 65년 7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측 주장대로 독도는 회담 현안에서 제외됐다.

이 때 김종필 부장이 기자들에게 농담조로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62년 11월)고 실언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간도 문제 - "일·청 간도협약 무효" 지침 마련

정부는 일본 패전 이후 우리나라의 전승국 지위 확보에 대비, 50년 10월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자체 지침도 마련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주일대표부가 작성한 간도지역 지도를 포함한 세 장 짜리 필사본에는 “간도지방은 우리 영토”라며 “우리는 대일강화조약에서 이 실지(失地)를 회복하여 여사(如斯)한 불법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고 쓰여 있다.

일본과 청나라가 1909년 체결한 ‘간도에 관한 협약’이 우리의 영토를 자기 마음대로 획정했다고 지적한 대목도 있다.

그러나 이 지침은 대일강화조약인 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우리가 전승국 지위 획득에 실패하면서 적용되지 못했다. 외교부는 현재 간도협약이 법리적 측면에서 무효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김-오하라 메모의 실체

이번에 공개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작성과정은 대일 청구권 교섭이 결국 한일 막후 정치협상을 통해 풀렸다는 점을 입증했다.

62년 10월 김종필 중정 부장은 오히라 외상과 만나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 명목으로 6억 달러를 지원할 것을 제시했다. 오히라 외상은 3억 달러를 제시, 합의에 실패했다. 이후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6억 달러 이상 관철, 독립축하금 명목 불가’ 지침을 내렸다.

결국 11월 2번째 단독회담에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 등의 내용이 담긴 메모를 작성했다. 김 부장은 “단독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도록 하자”고 제안해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메모를 단초로 한일 청구권 협정이 마무리됐지만, 학생들의 반일ㆍ반정부 시위로 인한 6ㆍ3사태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업협정 - '12 해리 수용' 大選 의식 비밀로

63년 연말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 파급을 우려, 일본측 요구를 수용한 한일어업협정의 발표를 미룬 정황도 드러났다. 정부는 그 해 7월까지만 해도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으로는 영세어민의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40마일 전관수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본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측의 12마일 전관수역 주장을 수용할 의사를 밝히고 이를 비공개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8, 9월 최고회의, 중정, 외무부 당국자들이 참석한 7차, 9차 한일문제 대책회의 문서에서는 대선을 고려한 정략적 논의도 드러났다.

이들은 “(12마일로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비밀이 지켜지느냐가 문제다. 야당측의 공격 자료가 돼선 안 된다”(중정 국장), “대통령 선거 전에는 이 안은 내놓지 말아야 한다”(최고회의 위원)고 말하기도 했다.

정상원 기자 ornot@hk.c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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