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최종 수교 합의에 이르기까지 무려 13년8개월간 기나긴 협상을 벌였다. 1952년 2월15일 시작된 1차 회담 이후 양국은 감정대립과 협상 내용의 이견 등으로 난항을 거듭하다 65년 6월22일 이동원 외무장관과 일본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도쿄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 문서에 서명하면서 대장정 협상을 마무리했다.
한일협정 교섭의 초기단계인 1~3차 회담(52.2~53.10)에서 한국은 청구권 협정요강을 제시했으나 일본은 “일본인의 한국 내 사유재산에 청구권이 있다”는 ‘역 청구권’을 주장해 결렬됐다. 특히 3차회담의 끝 무렵 “일본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구보타(久保田貫一郞)의 망언으로 양국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구보타 망언으로 중단됐던 회담은 일측이 망언을 정식 취소함으로서 58년 4월 4차회담으로 재개됐다.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은 취소됐으나 다른 부분의 논의가 진전돼지 않았고, 4ㆍ19혁명이후 개최된 5차회담에서도 별 소득이 없었다.
회담은 5ㆍ16 이후인 61년 10월 개최된 6차회담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와 만나 조속한 국교정상화에 합의하면서 돌파구가 마련됐다. 이어 62년 10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을 만나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청구권 문제를 매듭짓는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굴욕회담을 중단하라’는 시위가 격화해 최종합의 직전에서 멈춰 섰다.
양국은 7차회담(64.12~65.6)에 이르러 수뇌부가 정치적 협상을 벌인 끝에 협상의 마침표를 찍는다. 시이나 외상이 65년 2월 방한해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임시 조인한 것을 토대로 양국은 같은 해 6월 ‘한일협정’에 최종 서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내에서는 한일합방이 원천 무효임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물론 독도 및 일본군 위안부 문제, 재일교포 법적 지위 등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지 않은 ‘미완의 협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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