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악(僞惡)이 작위(作爲)인 한 결국엔 위선이며, 자기비하도 모질게 보면 가면 쓴 자존심일 뿐이다. 위악과 위선의 경계, 혹은 자기비하와 자존심의 구분을 넘어서는, 관념과 인식 이전의 자기모멸은 어떤 것일까.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박남철 시인의 ‘바다 속의 흰머리뫼’는 그 무모한 의문을 충동해서는 질리게 되작이게 하는 시집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무수한 내 사진을 찢어오며 살아왔다.…//… 어제 오후의 내 사진에 대하여 내가 너무 질려버린 것은 너무나 나이 들어 보이는 한 보기 싫은 표정의 중년 사나이가 ‘나는 너야, 임마, 이젠 좀 포기하시지 그래? 앙? 글쎄 나는 너라니까, 임마, 앙?’하며 윽박질러오고 있어서였던 것이다.(‘내가 찾는 내 얼굴’)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자가 아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 따위에는 나는 아예 괴로워하지도 않는다!”(‘우리 선생님의 고래희에 부칩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남의 글을 읽는 형태로라도, 간신히, 읽을 수는 있는 형태로라도, 아직도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나 자신을 다시 간신히, 간신히 발견한다.(‘나는 지금 살아있는가?’)
‘나’는 “아이이이, 자기느으으은… ‘미셸 꼬뿌’가 말하기를…”의 가난한 교양(‘에디히 프롬과 미셸 꼬뿌’)과 “거짓말로 가득찬 현실” “서글픈 ‘한국 문학’의 현실”에 흐느끼기도 한다. “그래/ 너 잘난 세계의 개진아/ 대지의 은폐야// 나는 운다// 엉엉엉……// 거짓말이 하기 싫어서 나는 운단 말이다. 이 식민지의 것들아!”(‘하이데거의 ‘릴케론’아!’)
어떨 때 ‘나’는 지긋이 죽어 살자고 다짐도 하는데. “…조용히 부끄러워하는 꼴찌이든 시끄럽게 떠들며 고래고래 ‘1등’을 향해 술주정 같은 저주를 퍼부어대는 꼴찌이든 어차피 그들에게는 ‘조용한 침묵’이 가장 큰 위로가 되고 가장 큰 징계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이제 배우게 된 것이다.”(‘꼴찌에 대한 즉흥음’)
‘나’는 유유히 대양을 휘젓는 고래도 꿈꾼다. “뭇 갈매기들을 거느리고, 까불어대는 상어 몇 마리까지 덩달아 거느리고, 그리하여 까불어대는 상어들 따위에게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푸른 동해 바다를 가르는, 가끔씩 꼬리를 허공 높이 치켜들어 바다를 한번 천둥 치듯이 치기도 하는 검푸른 고래였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아침 단상’) 그것이 오연한 기상이기보다, 땅에서 배척당한 한 순치되지 않은 짐승의 자위 같아 언뜻 애절하기도 하다.
시사(詩史)가 아니라, 그의 시 자체를 두고 더 이상 형태 파괴니 해체를 들먹이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이, 애당초 그에게는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79년 등단해 이번 6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견지해 온, 자칭 이 ‘가짜 시인’의, 세상과 문학에 대한 진지하고 처절한 희롱이 끝내 아름답기를.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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