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4월7일 밤, 영국 켄트 주 바닷가에서 물에 흠뻑 젖은 양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정신없이 배회하는 것을 주민이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다가가 몇 가지 질문을 했으나, 겁에 질린 듯한 청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신분증 등 소지품이 전혀 없고 옷에 붙은 상표마저 모두 뜯어져 영국인인지 외국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난감해진 경찰은 청년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보호하도록 했다. 여기까지는 대수롭지 않은 얘기다. 그런데 한달 뒤, 청년이 피아노만 보면 제 정신이 돌아온 듯 차이코프스키 곡을 몇 시간씩 연주한다는 언론 보도가 영국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청년은 능숙한 필치로 그랜드 피아노를 스케치한 그림까지 남겨 관심을 증폭시켰고, 신원을 안다거나 추정하는 제보가 잇따랐다. 체코 출신 피아니스트, 파리의 거리악사, 캐나다 인디 음악가 등 온갖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진짜 신원은 오리무중인 가운데, 언론은 의료 전문가들을 인용해 그를 자폐증으로 진단하는가 하면 성대가 제거돼 말을 못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청년을 영화 속 주인공과 비교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피아노 맨’(Piano Man)이란 그럴 듯한 호칭이 등장한 것도 이쯤이다.
■ 신경쇠약에 걸린 천재 피아니스트를 그린 영화 ‘샤인(Shine)’을 떠올리던 언론은 급기야 바이올리니스트가 주인공인 영화 ‘라벤더의 여인들(Ladies in Lavender)’까지 끌어댔다.
영국 바닷가 마을에 표착한 폴란드 바이올리니스트와 노처녀 자매의 사연을 그린 이 영화가 미스터리와 감상적 요소를 훨씬 많이 갖춘 때문이다. 이런 열기 속에 할리우드가 ‘피아노 맨’을 영화로 만든다는 얘기가 등장한 것은 정해진 순서다. 청년의 신원과 사연을 확인하는 일만 남은 듯했다.
■ 그러나 며칠 전, ‘피아노 맨’은 허황된 추측과 거짓이 부풀린 얘기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인공은 안드레아스 그라슬(20)이란 독일 젊은이로, 동기는 분명치 않지만 자살하기 위해 파리를 거쳐 영국까지 온 것으로 확인했다.
그 동안 입을 열지 않은 것도 정신적 갈등 때문이고, 피아노 연주와는 거리 먼 것으로 밝혀졌다. 병원 관계자들의 사소한 얘기를 언론과 전문가들이 온통 과장했던 것이다. 그는 독일 부모 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국 언론은 질책과 반성에 휩싸였다. 남의 얘기로만 웃어 넘길 수 있을까 싶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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