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요즘 날씨 너무 좋습니다. 혹시 아직도 휴가를 떠나지 않으셨나요. 지금껏 휴가 가지 않으셨다면 둘 중 하나겠네요. 너무 바빴거나, 제대로 즐기려 휴가를 아껴두었거나.
매섭던 더위가 시나브로 사그러들더니 아침 저녁 부는 바람에선 가을의 냉기가 전해져 옵니다. 저물어가는 여름이 한낮에 잠깐 힘겹게 던지는 햇볕이 반가울 지경입니다.
쉬러 떠나는 여행이라면 지금이 제 철입니다. 여름의 꼭지점에 떠난 피서는 말 그대로 더위를 피해 도망간 것이지 ‘쉼’은 아닙니다. ‘쉼’을 ‘쉼’답게 하기엔 날씨도 인파도 거추장스러웠죠.
적당한 볕과 적당한 바람이 일렁이는, 한 무리 피서객이 물러간 뒤끝의 적막함 마저 감도는 지금이 한적하게 휴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조금 지나면 추석이다, 단풍 여행이다 번잡스러워집니다.
늦여름에 떠나는 호젓한 휴가지로 남도의 두 곳을 소개합니다. 남도의 북쪽 끝 담양과 반대편의 진도가 그곳입니다.
죽향(竹鄕) 담양은 짙은 초록의 고장입니다. 푸른 숲과 푸른 바람이 만든 음률에 저절로 몸이 들썩이는 풍류의 고장이지요. 대숲에 서걱대는 바람소리의 청량함을 뉘 있어 따라오겠습니까.
담양이 몸을 쉬는 곳이라면 진도는 마음을 쉬는 곳입니다. 질박한 우리네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찰진’ 땅입니다. 푸른 들녘, 너른 바다에 중모리로 휘감는 진도아리랑 가락이 떠다니는 신명의 고장입니다.
푸근한 남도의 품에서 생기를 담뿍 마시는 여행길. 지금 떠나십시오.
담양ㆍ진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남도/ 죽향과 선비의 땅 담양
시원한 바람과 초록의 그늘을 품에 안은 전남 담양. 너른 평야의 풍족함과 수려한 산세는 선비들의 풍류를 불러 일으켰고, 그 여유로움은 지금껏 담양의 하늘을 맴돌고 있다.
담양은 누가 뭐래도 대나무의 고장. 담양읍의 담양천을 끼고 선 언덕 위에 군에서 조성한 거대한 대나무숲 ‘죽녹원(竹綠園)’이 있다. 5만여평을 가득 메운 대숲의 위용이 만만치 않다. 숲속으로 난 흙길 산책로를 걸으며 죽향에 빠져들었다.
묵은 때를 씻고 초록의 생기를 담뿍 받는 대나무 삼림욕. 대숲의 푸름은 깊고 또한 맑다. 마치 초록의 정령이 떠도는 듯 습한 숲의 기운이 겨드랑이를 살살 간질이는 것 같다.
산책로는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등 예쁜 이름표를 달고 서로 이어졌다. 구불구불하면서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절히 조화돼 부담을 주지 않는 산책로다. 끝자락 가장 깊은 숲길인 선비의 길을 지나면 대숲이 끝나며 아담한 향교와 향교만큼 조용한 마을로 내려오게 된다.
죽녹원을 나와 담양천의 다리를 건너면 맞아 주는 천변 둑방이 바로 관방제림(官防堤林)이다. 조선 중기 인조 때 하천의 홍수를 막으려 둑에 조성한 풍치림이 지금껏 보존돼 울창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곳이다. 300년 이상된 팽나무, 느티나무, 음나무 등 노거수가 2km가량 둑을 따라 도열해 있다.
이 숲은 주민들의 쉼터다. 여자석이라 써 붙인 평상 위에선 동네 아낙들이 고구마 순 한 소쿠리 가운데 두고 껍질을 까며 정담을 나누고, 경로석이라 써 붙인 평상에선 할아버지들이 화투 삼매경이다.
조용하고 편안하며 아늑한 쉼의 길이고, 쉼의 숲이다.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된 터에, 지난해에는 제 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검증’ 받은 숲이기도 하다.
담양은 또 은일의 선비들이 소요하던 정자와 정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 담백하고 편안한 조선시대 전통 정원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은 8월이면 특히 눈부시다. 약간 구릉진 곳에 명옥헌 정자가 있고 그 아래 둥근 섬을 안은 방자형 연못이 있다. 연못과 정자를 에두른 배롱나무 수 십 그루는 지금 선연한 붉은 꽃으로 만발하다. 배롱꽃 사태다.
마음은 속절없이 현혹당한다. 명옥헌을 찾은 이들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번진다. 꽃에 물들었나, 황홀한 풍경에 달아올랐나. 꽃이 곧 나 자신이고, 내가 꽃이다. 모두의 얼굴도 발그레 홍조 띠었다.
명옥헌원림 입구인 후산마을 앞 연못도 썩 운치있는 곳이다. 아름드리 왕버드나무들이 개구리밥 가득한 녹색 연못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은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를 잃은 양산보가 자연에 숨어 살겠다며 꾸민 곳이다. 대숲 우거진 입구를 지나면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먼저 반겨온다.
계곡 안쪽에 붉은 배롱나무 배경으로 광풍각이 있고 그 뒤로 제월당이 내려보고 섰다. 숲과 계곡, 그리고 정자.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가 딱 맞는 표현이다.
그림자도 쉬고 간다는 식영정(息影亭)이 소쇄원과 가까이 있고 면앙정, 독수정, 송강정 등 풍치 좋은 정자들이 담양의 곳곳에서 객의 발길을 자꾸만 늦춘다.
담양=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남도/ 진도의 숨은 보석 조도
진도는 분명 섬이다. 하지만 뭍의 냄새가 짙다.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섬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진도대교로 육지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 모두 ‘섬’이란 단어가 원초적으로 풍기는 아련한 느낌을 약화시키기에 족하다.
진도는 자체가 섬이면서 230개의 또 다른 섬들을 끼고 있다. 그 중 행정구역상 조도면은 특히 총 154개의 섬을 거느린, 우리나라 면 단위 중 가장 많은 섬을 거느린 곳이다. 이름도 섬이 새떼처럼 많다고 해서 조도다.
상조도와 하조도를 묶은 조도가 당연히 가장 큰 섬이다. 바로 아래의 관매도의 유명세 탓에 관광객을 태운 배가 잠시 들렀다가는 경유지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이는 조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모르는 탓이다.
세상의 때 묻지 않은 천혜의 풍광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다도해의 아름다움을 한껏 품에 안은 조도의 비경 속으로 안내한다.
진도 팽목항의 이른 아침. 6시 40분에 떠나는 첫 배에 가까스로 올라 탔다. 여름을 아쉬워 하는 바닷 바람이 시원하게 옷깃을 파고 들었다. 30분도 안돼 도착한 하조도의 어류포항. 멀리 섬의 왼쪽 기슭에 서 있는 하얀 등대가 마음을 빼앗는다. 다행히 등대 입구까지 차 한대 지나갈 길이 나 있다.
큰 놈과 작은 놈. 2마리의 개가 마중 나온 하조도 등대는 1909년에 첫 불을 밝혔다 하니 머잖아 100살이 코앞이다. 순백의 등대 건물을 축대가 감싸고 있는 모양이 영락없는 작은 성이다. 등대성(城).
풍경을 망치는 것은 등대 옆에 새로 지은 통신탑. 문명의 이기가 야속하다. 등대 윗 자락 언덕에 올라서니 한 폭의 동양화처럼 기암병풍이 둘러쳐 있다. 주민들이 만물상이라 부르는 절벽이다. 그러고 보니 금강산의 만물상을 닮았다. 푸른 풀섶에 박힌 샛노란 원추리꽃과 붉은빛의 나리꽃이 호젓한 풍경에 색을 더 한다.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타고 갯내음 실컷 들이키며 달리면 어느덧 조도대교. 상조도로 넘어가는 다리다. 작고 예쁜 상조도 분교를 지나 여미항에 닿기 직전에 도리산(210m) 전망대로 오르는 길을 만난다.
정상에는 KT 기지국이 서 있고 바로 아래 통나무로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새떼 같다던 섬들이 펼쳐내는 풍경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명불허전이라. 하조도를 비롯해 나배도 대마도 소마도 관사도 눌옥도 등 주변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인공물인 조도대교도 그럴듯하게 녹아 들어 풍경의 운치를 더한다. 바다는 아늑했고 섬들은 서로 수다를 떠는 듯 다정했다.
이 전망대는 하조도의 돈대봉(230m) 정상과 함께 다도해로 뜨고 지는 붉은 햇덩이를 함께 볼 수 있는 명소다. 하조도의 돈대봉은 바닷바람으로 땀을 식히며 오르는 섬산행 코스로 제격인 곳이다. 도리산 전망대 아래의 방지깨미는 너른 뻘 가득 조개를 담고 있다.
조도의 해수욕장으로는 하조도 동남쪽 육동리를 지나 만나는 신전해수욕장이 유명하다. 모래질이 단단해 자동차가 지나도 바퀴가 빠지지 않는다.
전망대가 아니라도 좋다. 해수욕장이 아니라도 좋다. 조도의 바다 풍경은 섬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가슴을 벅차게 한다. 조도 가는 배는 진도의 서남쪽 팽목항에서 탄다. 조도까지는 하루 5회 이상 배가 운항하며 운임은 어른 3,000원. 차량을 싣고 갈 경우 승용차 1만4,000원(운전자 운임 포함)이다. 진도군 문화관광과 (061)540-3125, 팽목항 (061)544-5353
진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남도/ 원형의 섬 진도
소설가 김훈은 진도를 ‘원형의 섬’이라 이름했다. 당골네가 살아 여전히 씻김굿을 펼치는, 전통과 전설이 살아 꿈틀대는 땅. 진도.
춤과 노래로 망자를 보내는 씻김굿으로 대표되는 진도의 장례 의식. 다른 지방의 엄숙한 장례 문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출상 전날 슬픔에 절은 상주를 위해 펼치는 웃음극 ‘다시래기’도, 마을 여자들이 상두꾼으로 나서 상여소리를 하는 만가도 진도만의 죽음 의식이다.
통곡 대신 소리와 춤으로 맞는 죽음. 뭍과 다른 이들의 문화를 두고 혹자는 ‘고려’가 남아 있는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억압은 없이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고려의 문화가 지금껏 꿈틀거리는 거라고.
진도는 삼별초의 역사를 품고 있다. 삼별초가 세계를 제패한 몽골에 맞서 ‘독립 고려’의 정부를 세웠던 곳이 바로 여기다. ‘고려의 땅’ 진도를 제대로 만나러 삼별초의 발자취를 좇아보자.
1984년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 뭍과의 연결 통로였던 벽파진에서 길은 시작된다. 길목의 용장산성.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왕으로 삼은 뒤 산성을 쌓고 궁을 지어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궁터는 꽤 넓다. 계단식으로 차곡차곡 이어진 축대가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지금은 잡풀만 무성한 녹색의 정원인 이 곳은 700여년 전 독립 고려의 꿈을 노래하던 곳이다.
삼별초군은 이 곳에서 끝까지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결국 패퇴하게 된다. 퇴각하던 왕은 진도읍에서 운림산방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논수골에서 최후를 맞았다.
왕온의 묘가 남아있다. 제주도로 가까스로 옮겨간 김통정의 퇴각로를 따라가면 의신면 만길리에 당시 궁녀들이 떼로 목숨을 잃은 바위 ‘궁녀둠벙’이 있고 금갑리에는 작은 봉화대 역할을 한 사구미연대와 금갑진성이 있다.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 장군이 선택한 퇴로는 임회면의 남도석성 방향. 배장군은 이 곳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지금 남아 있는 남도석성은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증ㆍ개축한 것이다. 둘레 610m의 석벽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규모는 서산의 해미읍성이나 순천의 낙안읍성 등에 비해 작지만 성곽의 두께와 위용은 그 이상이다.
성곽 만큼이나 남도석성이 반가운 이유는 성안에 살아있는 마을이다. 흙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굴뚝으로 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돌담, 흙담에는 호박 넝쿨이 타고 올라 노란 꽃을 피우고 마당의 멍석 위에는 빨간 고추들이 햇볕을 마시고 있다. 성루 그늘엔 허름한 소파 놓여져 김 매다 지친 한 할아버지 단잠을 주무신다. 성곽은 성곽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박제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 있는 곳. 마음 속으로 꿈꿔 왔던 정겨운 우리네 고향이 거기 있다.
성의 벽을 휘감고 자그마한 개울 세운천이 흐른다. 세운천에 놓인 돌다리 두개가 시선을 잡아끈다. 남문 밖에 있다해서 ‘남박다리’로 불리는 아치형 돌다리다.
자연석을 포개 둥글게 감아 올린 모양이 정겹다. 물길 좁은 곳에 단홍교, 조금 넓은 곳에는 쌍홍교가 작지만 단아한 멋을 풍기고 있다.
진도=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길에서 띄우는 편지/ 진도
진도의 한 해안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해질 무렵이었죠. 사위는 어둑해지고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밥 냄새에 문득 가족이 그리워지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제 옆으로 급강하를 하더니 땅바닥을 훑듯 미끄러져 날아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제비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어릴 적 서울의 골목길을 헤집고 다녔던 제비가 생각났습니다. 제비의 날렵한 비행은 그 골목길에서 보낸 유년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여행은 이렇게 기억을 더듬게 하고 추억을 떠올리게도 해 더욱 매력적일겁니다.
다음날 남도석성을 본 후 용장산성을 거닐고 있을 때 생경한 발신 번호가 휴대폰 벨을 울렸습니다. 중년의 신사분 목소리가 저의 이름과 신분을 확인하고는 남도석성에 있었던 사람인데 기억나느냐고 묻습니다. 또래의 여인과 함께 있었다던.
“사진을 많이 찍던데 우리들 모습도 담지 않았나 해서 전화 걸었습니다. 혹시라도 사진 찍혔다면 꼭 지워주십시오.”
갑작스럽고 간곡한 전화에 그냥 “네, 그러죠”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카메라에 담긴 화상을 검색해 문제의 두 컷을 바로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몇분 후 똑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고, 자기를 기억하는지 재차 확인하더군요. 되물었습니다. “제 전화 번호와 이름은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는 “한국일보 로고가 박힌 회사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서울의 편집국으로 전화해 지금 진도에 간 기자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꽤나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두 분이 무슨 관계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 먼 곳까지 왜 왔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건 두 분의 이번 진도 여행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겨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조심스럽지만 그래서 더욱 짜릿했던 ‘추억’이 될까요. 비밀스러운 추억은 불안할 수 밖에 없을텐데요.
여행은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추억과 추억거리를 선물하나 봅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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