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부가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임으로써 6자 회담에서 북한과의 핵심 쟁점을 좁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미국의 입장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현재도 미래에도, 핵무기 제조용이든 민간 발전용이든 북한 땅에 어떤 핵 시설도 허용할 수 없다는 완고한 원론은 어느 정도 수정된 것처럼 보인다.
23일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 보장 요구에 대한 한미 외무장관 협의 결과를 전하는 반기문(潘基文) 장관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반 장관은 이날 외무장관 회담 후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궁극적으로 “북한에 평화적 핵 이용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미국이 ‘OK’했다는 식의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과 유익한 협의를 통해 충분한 교감을 이뤘다”는 말 속에 미국 정부의 달라진 입장을 감춰 두었다. 이 달 말 6자 회담이 재개될 때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올릴 보따리를 미리 펼쳐보이지 말자는 양국간의 약속을 짐작케 한다.
이런 태도는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ㆍ태 담당 차관보에게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날 국무부 출입 기자들의 모임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북한과 무언가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협상의 와중에서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힐 차관보의 발언은 6자 회담 휴회 후 조지 W 부시 정부 내부에서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 요구 수용 여부를 두고 진행돼온 격렬한 논쟁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힐 차관보는 지난 6자 회담 초반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핵확산금지협약(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면 평화적 핵 이용을 보장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가 본국 정부의 질책성 훈령을 받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었다. 아직 부시 정부 내에 대북 협상에 회의를 갖고 있는 강경파의 입김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힐 차관보를 비롯한 대북 협상파는 내부 논쟁에서 “북한의 요구는 이론적인(theoretical)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로 어떤 핵 발전 시설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파들을 일단 다독인 것으로 보인다.
힐 차관보는 국무부 출입 기자들에게 “북한이 협상 결과 핵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한 뒤에 다시 핵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가난뱅이가 포르쉐 자동차를 갖고 싶다고 해서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갖고 싶다는 소망까지 막을 필요는 없다는 논리이다.
미국의 입장 변화로 6자 회담의 재개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 문제는 북한의 반응이다. 평화적 핵 이용권 보장 요구가 애당초 협상의 타결보다는 지연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다른 요구를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여러 조건을 다 충족한 뒤에야 미래에 핵 평화적 이용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미국의 해법에 북한이 동의할지도 미지수이다.
워싱턴=김승일 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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