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관한 한 지상파 방송사의 군림은 옛말.” “명절 상납에 제작비 떠넘기기 등 방송사들의 횡포는 여전.” 방송 드라마 제작 현실을 둘러싼 이 대조적인 주장의 진실은 무엇일까.
얼마 전 영화계에서 불거진 ‘스타 권력화’ 논쟁을 계기로, 방송가에서도 스타와 연예기획사, 스타 캐스팅을 앞세운 외주제작사들에 방송사들이 휘둘리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원인 분석과 해법은 구구했지만 방송사들이 ‘절대 권력’을 쥐고 군림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게 중론이었다. 방송 3사는 연기학교 설립 등 공동대응책 모색에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꾸로 ‘힘 없는’ 외주제작사들에 대한 방송사들의 횡포가 도마에 올랐다.
최근 외주제작사 전 직원이 “S프로덕션이 KBS 월화드라마를 제작하면서 KBS 간부에게 거액의 설 선물을 건네고, KBS 파견 PD들에게 야외진행비 등 명목으로 매달 150만~200만원을 지급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리사슬’ ‘검은 거래’ 등 방송사들을 질타하는 보도가 쏟아졌다.
외주제작= '뒷돈 드라마'?
S프로덕션 사례에서 문제된 것은 크게 ‘명절 떡값’과 ‘야외비’ 등 명목의 금품수수다. 후자에 대해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측은 공히 “야외진행비 등은 제작비에 당연히 포함되는 것인데 ‘뒷돈’인양 알려져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PD들이 작가, 연기자 등을 섭외하고 많게는 100명이 넘는 연기자와 스태프들을 이끌고 촬영을 진행하려면 현장에서 바로 처리해야 하는 잡다한 경비가 적지 않는데, 이런 경비는 ‘PD진행비’ 등 항목으로 공식 책정돼 있다는 것이다.
방송사가 자체 제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외주제작사 대표는 “월 150만~200만원을 ‘PD진행비’로 책정하고 있다”며 “대개는 법인카드로 정산하는 식인데, 만약 현금을 직접 건넸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돈 자체가 아니라 전달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명절 떡값’은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거론된 당사자들은 정육 등 선물 외에 상품권 수수는 부인하고 있고, 당시 S프로덕션 이사 K씨도 “상품권 리스트를 만들고 회장 결재까지 받았지만 KBS측에서 거부해 집행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관행화한 ‘명절 떡값’에 대한 소문이 여전한 것 또한 사실이다.
외주제작사, 영원한 약자인가
올 초 MBC 고위간부가 포함된 ‘구찌 핸드백’ 사건, 최근 브로커 홍모씨의 전방위 로비사건 연루에 이어 ‘뒷돈 드라마’ 의혹까지 불거지자, 방송사 관계자들은 망연자실한 채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방송사들이 외주제작을 둘러싼 ‘비리 먹이사슬’의 포식자로 간주되는 데 대해서는 불만을 토로한다. 편성권을 쥔 방송사들이 계약상 ‘갑’의 입장인 것은 분명하지만, 외주제작사들도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는 약자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MBC 드라마국 간부는 “요즘 드라마의 성패는 스타 작가, 스타 연기자를 잡느냐 못 잡느냐에 달려있는데 스타 섭외능력은 이미 외주사들이 앞서 있고, 대형 외주사들은 스타 PD, 스타 작가를 영입해 100% 자체 제작에까지 나서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소규모 신생 제작사들은 몰라도 실적이 좋은 대형 제작사들의 경우는 방송 3사 간부들로부터 거꾸로 ‘관리’를 받기도 한다”고 달라진 상황을 전했다.
문제된 S프로덕션 전 간부도 “회사가 KBS에 잇달아 납품할 수 있었던 것은 K, J씨 등 당대 톱 작가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정연주 KBS 사장은 지난해 경쟁사 작품을 막 끝낸 K씨에게 식사대접을 하며 “다음엔 우리와 하자”고 간청했고, 올해 S프로덕션 외주제작으로 방송된 K씨의 작품은 시청률과 작품성 모두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외주제작 시스템 대수술 필요
이번 사건과는 별도로, 외주제작 시스템 전반에 대한 대수술은 필요하다. 제작비 산정이나 국내ㆍ외 판권, OST, DVD 저작권 등을 둘러싼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 다툼이 끊이지 않고, 이 과정에서 시청률 40, 50%를 넘긴 소위 ‘대박’ 드라마를 만들고도 방송사들이 턱없이 적게 지급하는 제작비 등 탓에 정작 외주제작사들은 ‘쪽박’을 찼다는 이야기들도 들린다.
결국 최종 피해는 총 제작비의 40, 50%에 육박하는 주인공 2, 3명의 출연료(PD연합회 분석자료)에 비하면 ‘쥐꼬리’나 다름없는 돈을 받는 조연급 연기자나 스태프들에게 돌아가고, 그나마도 제때 지급되지 않아 법정 소송으로 번지는 일이 적지 않다.
방송위원회가 외주제작 의무편성 비율을 계속 늘리면서도 외주제작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말 방송사와 외주제작사간 표준계약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지만 구속력이 없어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사실 외주제작 관련 불공정 거래는 한류 붐을 타고 급성장한 드라마 제작사들보다는 규모가 영세하?프로그램의 일부 코너를 ‘하청’ 받는 경우가 많은 교양, 오락 등 분야가 훨씬 심각하다. 외주제작사 관계자들은 “특정 회사나 몇몇 관련자들의 비리 차원이 아니라 외주제작 시스템 전반에 대한 재검토와 대책 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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